삼대의 이질적 가치관과 점진적 개량주의

「삼대」(『조선일보』, 1931.1.1.~9.17.)는 가족의 삶을 통한 세대 간의 갈등과 돈을 매개로 벌어지는 계층 간의 갈등을 서술한 소설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이름난 만석꾼 조씨 일가를 3대의 식민지 현실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조덕기와 김병화 그리고 피혁을 등장시켜 그들의 갈등을 서술하면서 개량주의적인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구한말 세대인 조의관은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지켜나가고 가문의 권위를 어떻게 유지해나갈 것이며 사후 사당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고심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국가에 전혀 관심이 없다. 개화기 세대인 조상훈은 신교육도 받고 애국심도 있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계집질과 노름에 빠져든다. 염상섭이 역점을 두고 비판한 것이 개화기 세대이다. 식민지 세대인 조덕기는 조부의 전통적인 가치관에도 문제가 있고, 부친의 전통적 가치관의 전면적인 부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조의관과 조상훈의 갈등은 전통적인 사회로부터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은 서구 추수주의나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이 시급히 요청된다. 그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인물이 조덕기다. 그는 염상섭이 가장 따뜻한 눈길을 준 세대이다. 작가는 사회주의자인 김병화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따뜻하게 눈길을 주고 있다. 김병화는 조덕기의 친구로 사회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냉철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심정적이고 과격한 면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경애가 피혁에게 후진 양성 명목으로 받은 돈을 전용하여 가게를 낸다. 홍경애는 우국지사의 딸로 조상훈의 도움을 받고 그의 첩이 되었다가 버림을 받는 여인이다. 그녀는 피혁을 만나 새로운 인물로 변신을 시도하나 김병화와 사랑에 빠져 조직을 배신하게 된다.

(1930년대 경성 풍경)


염상섭의 자료 조사는 1981년부터 시작했다. 1981년 중앙대 한국학연구소에서 김근수 편저 『한국 잡지 개관 및 호별 목차집』(한국학연구소, 1973)을 보고 염상섭이 발표한 작품 목록을 작성하였다. 중앙대 한국학연구소는 『폐허』 창간호에서부터 대부분의 잡지 원본을 소장하고 있었다. 작성한 목록에서 소장 도서관을 확인하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신문과 잡지 등을 대출받아 필요한 부분들을 복사하거나 필사하였다. 이들 자료를 「20년대 소설연구의 현황과 문제점」(『한국학보』, 1983 가을)을 작성할 때 참고하여 염상섭의 초기 소설론을 서술하였고, 1988년 박사학위청구논문 「한국근대소설론연구」의 ‘본격적 소설론의 성립과 소설론의 심화’라는 장에서 염상섭의 개성과 예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그가 주장한 자아 각성과 회복, 개성의 발견 등은 비관적 운명론과 연결되어 있고, 도덕적인 의미가 제거된 세계에 던져져 있는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996년 ‘영상문학기행’의 중심적인 답사 대상 작가로 염상섭을 설정했다. 답사지에 삼대의 배경 가운데 본정통 카페 빠커스, 안국동 예배당, 남대문 대한정미소, 삼청동, 효자동 산해진 가게, 소격동 의전병원, 진고개 K호텔, 종로, 광화문, 총독부, 조선은행, 종로서, 경성우편국, 경무국, 서대문 감옥, 남대문 장, 경성운동장, 그의 생가인 종로구 필운동 야조현 고가나무골, 그가 다닌 보성중학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근무하던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옆 골목 등을 포함하였다. 보성중학교는 현재 조계사 내 불교중앙박물관 자리다. 진고개는 당대인들에게는 별천지였으나 조씨 삼대를 몰락으로 이끈 식민자본의 첨단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삼대 속 청년들은 암울한 현실을 떠나서 진고개로 향했으나 타락하거나 훼절했다.

(1930년대 진고개)


그는 본정통과 삼청동 일대에서 술을 마셨다. 수주 변영로의 「백주에 소를 타고」(『酩酊四十年』)에는 그가 대낮에 알몸으로 소를 타고 종로 보신각까지 활보한 사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당대 최고의 술꾼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수주 변영로, 공초 오상순, 성재 이관구, 횡보 염상섭이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송진우에게 50원을 빌려서 성균관 뒷산 사발정 약수터로 갔다. 술에 취한 그들은 벌거벗은 알몸으로 소를 타고 孔子를 모신 성균관을 지나 큰 거리까지 진출했다가 종로 보신각으로 내려왔다. 송진우 선생이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이니 1920년대 후반의 일로 보인다. 성균관 뒷산에 가서 四鉢亭 약수터를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경기대 이재범 교수에게 물었더니 사진을 보내주었다. 四鉢亭은 북악산 기슭의 삼청공원 내에 있었던 정자로 앞에는 삼청천이 흘렀고 약수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도 없다.

횡보의 술에 얽힌 이야기는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동광, 32.1)에도 나타난다. 소설론 강의 시간에 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단잠을 깨우는 최고의 약이었다. 방탕한 생활로 생식능력을 잃은 M이 결혼 후 얻은 아들을 보며 ‘발가락이 닮았다’고 자기를 합리화하는 과정을 의사 친구의 시선으로 그린 단편소설이다. 등장인물 M이 염상섭의 영문 약자라고 하여 당시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김동인이 염상섭의 방탕한 삶을 문제 삼은 작품이다.

2005년 9월부터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 지원 사업을 수행하면서 「북간도에 투영된 탈식민주의 연구」(2005)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간도 연구를 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인 그가 어떻게 만선일보 기자를 하고 만주에서 일본기업의 홍보담당을 했는가가 궁금했다. 연변대의 김병민, 김관웅, 김호웅, 김강일, 박찬규, 김광수, 이광일, 우상렬, 전영 교수와 길림대의 윤윤진 교수를 만나서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만주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滿洲가 아닌 僞滿洲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間島라고 정정해주곤 했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한다는 북향정신의 실체는 무엇일까 대단히 궁금했다.

(1930년대 만선일보)


2006년 長春(滿洲의 수도 新京)에서 만선일보 터를 답사했다. 횡보는 1936년 만몽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하다가 1937년 新京의 만몽일보와 龍井의 간도일보가 통합하여 만들어진 만몽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했다. 만주국의 건국이념이었던 오족협화와 왕도낙토는 일제의 식민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어 있다. 일제는 滿鮮一如를 달성하고, 五族(조선족, 중국한족, 만주족, 몽고족, 일본족)의 協和를 도모하기 위해 언론통제가 가능한 기관지가 필요했다. 그 기관지에서 일제의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선전하여 수많은 조선인을 북향정신이라는 미망으로 이끈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만선일보 기자시절)


滿洲는 선구자의 땅이다. 그들은 말을 타고 거친 대륙을 가로질러 海蘭江邊을 달렸다. 아울러 만주는 유이민의 땅이었다. 가난에 쫓긴 조선 농민들은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을 등지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다. 한일병탄과 3.1운동을 전후해서 우리 민족의 대규모 이주가 시작되었고,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이 일본군의 대토벌로 약화하면서 이주 농민들은 간도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했다.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제의 농업 식량 기지 건설을 위한 이주정책으로 수많은 농민이 제2의 고향을 꿈꾸면서 만주로 갔다. 당시 만주에는 150만~200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1937년에 만주로 이주한 정판룡은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주로 가자. 만주에 가면 땅도 많고 들도 넓다고 하더라. 마적패들이 욱실거린다고는 하지만 하물며 마적들도 사람들일 터인데 우리처럼 불쌍한 생명을 마구 죽이지야 않겠지. --- 중략 --- 봉천 서탑 같은 데는 우리 같은 조선 사람이 많이 함께 모여 산다고 하더라. --- 중략 --- 기름진 땅이 그리 많다는 만주에 가면 꼭 살길이 있을 것이다.’(『고향 떠나 50년』, 민족출판사, 1997) 그런데 만주에서 조선인은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의 2등 국민이었다. 식량 배급 순서는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순이었고 공사현장의 임금 역시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순이었다. 금액의 차이도 컸다. 만주는 조선인에게 기회의 땅이 아니었고, 만주에서 조선인은 뜨내기 유랑민과 같은 존재였다.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보성소학교로 전학하여 보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12년 일본으로 가서 다음 해 東京麻布中學에 전학하여 聖學院을 거쳐 京都府立第二中學을 졸업했다. 1918년 慶應大 사학과 예과에 입학했다. 오사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1920년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창간 멤버로 입사하여 정경부 기자가 되었다. 그후 오산학교 교사, 동명지 편집, 시대일보 사회부장 등을 역임했다. 폐허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1929년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하다가 만주로 가서 1936년 만몽일보와 1937년 만선일보의 주필과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염상섭은 사장 진학문의 강요로 소설을 쓰지 않았으나, 「만선일보」는 재만 조선인의 문단지 역할을 해냈고, 편집국에서 1941년 ꡔ싹트는 대지ꡕ를 발간하였다. 그는 ꡔ싹트는 대지ꡕ의 서문에서 ‘만주 개척민은 예나 이제나 호미나 바가지 짝밖에 가지고 온 것이 없으나 그 바가지에는 생활이 담겨 있고 그 호미 끝은 거친 정서를 돋구기에 넉넉하니 여기에도 문학은 자라’나고 있었다고 했다. 「만선일보」를 그만두고 만주국 국책회사인 안동의 대동항건설주식회사 홍보담당으로 일했다. 1954년 서라벌예대 초대 학장을 역임하고 1956년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염상섭은 자신의 소설에서 고통스러운 현실과 지식인의 고뇌를 다루기도 하고, 비참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다루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세밀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했고, 인격주의 비평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백악 씨의 「자연의 자각」을 보고서」에서 투철한 작가의식에 의해 작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자기 과시욕에서 글을 쓴다고 김환을 비판하였다. 김환의 작품의 수준에 대해서는 창조의 발행인인 김동인조차도 비판한 바 있다. 「여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서 예술작품을 평가하려면 작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김동인이 주창한 형식주의 비평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는 개성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생활 현실에 근거한 문학으로 구체화하였고, 한국 최초로 자연주의를 작품에 구현한 작가였다.


(필자 송현호 아주대 명예교수)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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