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A(대한아마츄어야구협회)회장시절 고척동돔구장에서 응원전 펼치는 필자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고난이 아니라, 죽음과 고난에 대한 공포이다.”
이 문장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우리는 흔히 죽음과 고난을 인생 최대의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상상하며 키워온 두려움임을 알게 된다.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수백 번 미리 경험하고, 닥치지 않은 고난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드는 공포의 실체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두려운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은 고통의 연장이 아니라, 고통의 종결일 수 있다. 삶이 우리에게 안겨준 근심과 상처, 번민과 갈등을 더 이상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평안의 상태.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은 죽음을 공포가 아닌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였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미지이기 때문이지 잔혹해서가 아니다.
고난이나 역경 역시 마찬가지다. 고난은 분명 큰 고통을 동반한다.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돌아서고 싶은 길이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성장은 고난과 역경을 겪고난 뒤에 이루어졌다. 근육은 저항을 받아야 강해지고, 정신은 시련을 견뎌야 단단해진다. 고난이 없다면 성장은 없고, 성장이 없다면 삶은 정체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과 역경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는 필수 조건이다.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죽음도, 고난도 아니다. 그것들을 과도하게 두려워하며 삶을 움츠리는 생각이나 태도다. 공포는 인간의 상상력과 결합할 때 현실보다 훨씬 더 거대한 괴물이 된다. 실제보다 더 아프고, 실제보다 더 잔인한 적을 마음속에서 키우며 우리는 스스로를 포위한다.
그래서 오래된 말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문장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은 무모함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숙명을 직시하되, 태도만큼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라는 선언이다.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두려움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당당히 맞설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같은 죽음, 같은 고난이라도 어떤 이는 그것에 짓눌려 무너지고, 어떤 이는 그것을 딛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선다. 차이는 상황이 아니라 기상(氣象)에 있다.
중소ㆍ벤처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강변하는 필자
죽음과 고난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기상, 이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의 조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부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존엄을 잃지 않고, 두려움에 삶의 방향을 내주지 않는 내적 승리를 의미한다. 죽음 앞에서 삶을 겁내지 않고, 고난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끝까지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다시 묻는다. “그 두려움은 과연 실체인가, 아니면 네가 만들어낸 그림자인가?”
두려움의 정체를 직시하는 순간, 죽음은 평안으로, 고난은 성장으로 의미가 바뀐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기상으로 삶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고난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도달하는, 자유로운 인생의 경지가 아니던가.
<박상희 한국농어촌희망재단 이사장/ 건국대학교 총동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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