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린 민초는 인육까지 먹었다…천국 대신 펼쳐진 건 지옥도
中 태평천국의 난 조명한 신간 '천국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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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상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어린 시절부터 마을의 천재로 소문난 홍수전은 가문을 일으켜 세울 기대주였다. 큰 기대 속에서 공부에 매진했지만, 번번이 과거시험에선 낙방했다. 20대 중반에 이르러 세 번째 본 과거까지 떨어지자 앓아누웠다. 이승과 저승을 오간 40일간, 그는 환영에 시달렸다.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네 번째 과거에 도전했으나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실의에 빠진 그는 우연히 기독교 서적을 보게 됐고, 꿈속에서 본 환영의 의미를 마침내 해석할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할 화신이었다. 성경도 그를 위해 쓰였다고 홍수전은 믿었다. 그는 곧 '배상제회'(拜上帝會·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했다. 그는 신묘한 기적을 잇달아 선보이며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홍수전의 기도 한 번에 전염병이 낫는 '기적'을 본 민초들은 집과 땅을 팔아가며 그를 따랐다. 세력이 커진 홍수전은 1851년 '태평천국'을 건국, 반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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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의 문건 [1861년 봄 태평천국 천왕을 자처한 홍수전에게 보낸 영국 선교사 조지프 에드킨스의 논문. 제목은 '하느님이 실재가 있다는 말은 단지 비유일 뿐이며, 형체가 없다는 것이 진실임을 논함'(上帝有形爲喩, 無形乃實論)인데 붉은 글씨는 홍수전의 자필이다. 홍수전은 이 글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라는 대목에서 '獨'자를 지우고는 '형'(兄)이라는 말을 쓰고 상제(上帝. 하느님)가 무형(無形)이라는 지점에는 유형(有形)이라고 덮어썼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근 출간된 '천국의 가을'(글항아리)은 1851년부터 1864년까지 발생한 중국의 내전 '태평천국의 난'을 조명한 책이다. 미국 매사추세츠대에서 중국사를 가르치는 스티븐 플랫 교수가 썼다. '태평천국의 난'은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전쟁이었다. 도시를 점령한 청나라군이나 태평천국군은 거주민들을 몰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진국이라고 자평했던 영국군과 프랑스군도 마찬가지였다. 이권에 따라 양측을 오락가락했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판단마저 할 수 없었던 유럽 군대는 청국 정부와 상대하면서, 때로는 태평천국군과 상대하면서, 노약자와 임신부를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내전 기간 2천만~3천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또한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허기에 지친 사람들은 식인(食人)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육이 널리 판매되면서 인플레이션 지표로 활용되기도 했다. "인육 30그램(g)당 가격이 전년보다 네 배 올랐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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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부두길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태평천국군은 초반부터 맹위를 떨치며 중국 남부지방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홍수전의 종교적 영도력에 이수성의 군사 전략이 보태진 태평천국군은 정부군을 잇달아 격파하며 안후이성, 장시성, 저장성, 후베이성 일대를 장악했다. 양쯔강을 정복한 그들은 중국 서부인 쓰촨성과 산시성까지 도모할 정도로 한때 막강한 세력을 떨쳤다. 청 제국은 태평천국군뿐 아니라 밀려드는 영국군, 프랑스군 등 식민제국주의 군대까지 상대하면서 몰락 직전까지 몰렸다.
만주족이 다스리는 청 제국을 구한 영웅은 증국번이라는 한족 학자였다. 증국번 역시 홍수전처럼 고향 마을에서 천재로 불렸다. 하지만 홍수전과는 달리 그는 과거에 잇달아 급제해 중국 최고의 두뇌들이 들어가는 한림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뛰어난 한학 실력으로 주목을 받던 중 군대를 맡게 됐고, 태평천국군에 대항하는 청 제국 최고 수장의 위치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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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번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무장이 아닌 문사였던 증국번이 처음부터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패전이 일상이었다. 실패에 낙담했고, 끊임없이 자기를 가로막는 비타협적인 관리들 때문에 그는 좌절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불굴의 정신 외에도 그는 용인술이 뛰어났다. 증국번의 스승 탕젠은 황제에게 그를 토벌대장으로 천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람들의 재능을 잘 알아보며, 사람들의 장점을 통합하는데 능합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써 잘 활용한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인내하는 것, 그리고 인재를 발굴하는 것에 능한 증국번은 결국 오랫동안 버틴 끝에 승기를 잡았고,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1864년 마침내 태평천국군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 홍수전은 이미 죽은 뒤였다. 증국번은 태평천국군 최고 장군 이수성을 붙잡음으로써 장기간의 내전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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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번의 제자이자 청나라 장군이었던 이홍장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당시 증국번의 권력은 황제를 능가했다. 오래 조련된 군대는 황제보단 증국번의 명령을 따랐다. 마음만 먹었으면 그는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장군이라기보단 본질적으로 유학자였다. 충(忠)의 개념이 그의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다.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역사에 정통한 그는 항우를 무너뜨린 후 토사구팽이 된 한신의 운명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증국번은 유방의 책사 장량이 그랬던 것처럼 은거를 꿈꿨다. 그는 권력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공부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증국번은 한신처럼 죽지도 않았지만, 장량처럼 되지도 못했다. 태평천국군 토벌 후 8년여의 여생 동안 그는 황제의 궁정에서 다른 관리들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당했다. 관리들은 그가 실력이 아닌 운으로 높은 지위를 얻었다고 트집 잡았다. 그렇게 모욕과 격무에 시달리면서 무의미한 노년을 보내다 그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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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책은 치열했던 중국의 내전을 생생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특히 책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증국번을 비롯해 천재적 지략가로 꿈과 대의를 좇았으나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이수성, 기독교적 평등사상을 구현하려 한 '간왕' 홍인간 등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 못지않은 흥미를 준다. 저자는 시간순에 따른 편년체(編年體) 방식과 인물 중심의 열전(列傳) 형식을 넘나들면서 어지러운 중국 근대사의 이면을 생생하게 들춰낸다.
임태홍 옮김. 720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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