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을 보내며, 2026년을 맞이하는 신앙과 책임의 성찰
인류의 역사는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언제나 가치의 선택 앞에 서 있었다. 권위주의적 탐욕과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반복적으로 사회를 병들게 한 이유는 제도의 실패 이전에 인간 내면의 방향 상실에 있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이 정의를 압도하고, 힘의 논리가 공동선을 밀어낼 때, 문명은 성장처럼 보이는 퇴행을 반복해왔다.
나는 2025년의 끝자락에서 이 사실을 다시금 기도의 자리에서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라는 고백은 막연한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겸허한 인식의 선언이다. 기술혁신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본래 중립적인 도구다. 그것이 왜곡될 때 독점과 실업, 양극화를 낳고, 바르게 사용될 때 양호한 일자리(decent jobs)와 지속가능한 사회보장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가치관이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한 번 구조적 변환(Structural Transformation)의 문턱에 서 있다. 이 변환이 또 다른 강자의 논리로 귀결된다면, 우리는 같은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강대국, 특히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국가들이 힘의 과시(Hard Power)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Universal Values)를 통해 ‘지구촌 문화공동체(Global Cultural Community)’라는 비전을 제시한다면, 세계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다.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 오지 않는다. 평화는 가치의 공유에서 시작된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개인의 기도는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 역사는 집단의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그 집단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부르심을 자각한 개인들의 선택이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 2시경 잠자리에 들며 기도해왔다.
“하나님, 부디 저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저를 사랑으로 사역해 주소서.” 그리고 눈을 뜨는 아침마다 다니엘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말씀 속에서 공동체를 위한 삶의 방향을 묻고, 은혜의 우물에서 공동체를 위한 응답을 길어 올리기를 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명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마무리를 어떻게 감당하셨는지를 묵상하며, 나에게 허락된 인생의 궤적 또한 그렇게 계획되기를 소망한다.
베드로 후서 1장 3절은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주셨다.” 신앙은 도피가 아니라 책임이다. 은혜는 안주가 아니라 소명이다. 디모데 후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살아가는 일은 개인 경건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쉬움이 남는 2025년을 보내며, 나는 묻는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보내고 인생의 마지막에 어떤 열매를 남길 것인가?” 이 질문은 2026년을 향한 가장 정직한 준비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마무리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개인의 하루가 모여 시대를 만들고, 시대의 선택이 인류의 방향을 결정한다.
새해는 달력의 변화가 아니라 태도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2026년이 기술은 진보하되 인간성은 회복되고, 경제는 성장하되 공동선은 강화되며, 국가는 경쟁하되 문명은 협력하는 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 기도의 출발점에, 오늘도 한 사람의 사명 자각이 있기를 소망한다. 기도는 여전히 가장 깊은 곳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만들어가는 자의 몫이고, 미래는 준비된 자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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