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식물에게 배우는 생존의 지혜
신간 '뿌리왕국'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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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생태원 열대관 뿌리식물 '시서스' (서천=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11일 충남 서천군 국립생태원 에코리움 열대관의 뿌리식물 '시서스'. 2025.2.11 kane@yna.co.kr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나무에 달린 잘 익은 빨간 사과는 유혹적이다. 참지 못하고 탐스러운 사과를 가지에서 따서 한 입 베어 물었다면, 누군가는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나약하고 무해한 사과나무를 멋대로 착취한 데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의 치밀한 설계에 나약하게 넘어간 것은 사과나무가 아닌 사람 쪽에 가깝다.

독일의 식물생물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인 데이비드 스펜서는 신간 '뿌리왕국'(흐름출판)에서 "열매의 언어는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를 정확히 겨냥해 설계되었다"고 표현한다.

도드라지는 강렬한 색상, 먹기 좋게 부드러운 질감, 침샘을 자극하는 향과 맛은 씨앗을 가장 멀리 운반해줄 수 있는 동물을 겨냥한 열매의 화학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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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뿌리내린 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흔히 수동적이고, 환경에 순응하는 나약한 대상으로 여겨지곤 한다. 먹이사슬 가장 아래 있는 생산자로, 작은 벌레들에 속수무책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능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생존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모든 생물의 생존에 필수적인 광합성이라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대신 뇌와 근육은 깔끔히 포기한 식물들은 타자와의 (화학적) 소통, 시간 인식, 기억력 등의 능력을 활용해 성공적으로 생존했다.

꽃으로 벌을 유혹하고, 열매로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 바로 식물이 가진 소통 능력이다. 낮 동안 해를 따라가는 해바라기의 꽃 머리가 밤 사이 다시 동쪽으로 꽃 머리를 돌리는 것은 다음 날 해가 다시 동쪽으로 떠오른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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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구와우마을 해바라기 태백 구와우마을 해바라기

(태백=연합뉴스) 임헌정 기자 = 28일 강원 태백시 황지동 구와우마을의 해바라기. 2025.7.28 kane@yna.co.kr

캐나다 연구자들이 2007년 서양갯냉이를 가지고 한 실험은 식물의 '친족 인식' 능력도 보여준다.

한 화분에는 엄마가 같은 씨앗들을 모아서 심고, 다른 화분엔 각각 다른 장소에서 수집된 씨앗을 섞어 심었더니, 두 번째 화분의 서양갯냉이들은 양분과 물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뿌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반면, 첫 화분의 '친남매'들은 뿌리 갈래가 비교적 적었다. 같은 친족 사이엔 협력적 관계를, 남남끼리는 경쟁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동물 못지않게 역동적인 식물의 생태를 보여주면서, 수억 년 지속된 '뿌리왕국'으로부터 인류의 미래를 위한 해법을 모색한다.

저자는 인간이 여러 생존 위협에 직면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식물이 필요하며, 식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리화학적 가능성이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뿌리를 내리는 식물 가족이 그러하듯 지속 가능한 성장과 생존을 위한 '공존'의 메시지도 식물이 주는 해법 중 하나다.

"인간이 동물계의 팝스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식물은 지속 가능한 삶, 즉 업데이트를 중단하지 않고 시스템 충돌도 일으키지 않는 최선의 삶은 오직 영리한 팀워크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91쪽)

배명자 옮김. 280쪽.

mihy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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