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패러다임 변화,달리는 거실

불과 몇 년 전까지 자동차 광고의 주인공은 '마력'과 '제로백'이었다. 얼마나 빨리 달리고, 얼마나 역동적인 코너링을 선보이는지가 차의 가치를 결정했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시장의 문법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이제 자동차는 도로 위를 달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온기를 나누는 ‘달리는 사랑방’으로 진화 중이다.

- 기계의 자리를 사람이 차지

이러한 변화의 일차적 동력은 역설적이게도 '엔진의 퇴출'에서 비롯되었다. 거대한 엔진과 복잡한 변속기가 사라진 전기차 전용플랫폼(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은 자동차 내부를 완벽하게 평평한 '거실 바닥'으로 만들었다.

과거 뒷좌석 발치에 툭 튀어나와 대화를 방해하던 센터 터널(차체 바닥가운데 튀어나온 부분으로 프로펠러 샤프트가 지나가는 자리)이 사라지자, 시트 배치는 자유로워졌다. 1열 시트를 뒤로 돌려 뒷좌석 사람과 눈을 맞추는 ‘스위블 시트(Swivel Seat:회전이 가능한 시트)’는 이제 먼 미래의 컨셉이 아닌, 실제 양산차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차 안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고립된 칸막이에서,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 '운전' 대신 '경험'을 채우다

기술의 발전은 핸들을 잡고 있던 운전자의 손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자율주행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운전자의 정체성은 '파일럿'에서 '콘텐츠 소비자'로 옮겨간다. 이 빈틈을 노리고 등장한 것이 바로 SDV(Software Defined Vehicle: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다.

이제 자동차는 거대한 스마트 기기다. 대시보드(Dash Board;자동차의 운전석앞에 여러계기들의 상태를 표시하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면)전체를 가로지르는 와이드 디스플레이는 영화관이 되고, 고성능 오디오 시스템은 콘서트홀이 된다.

차 안에서 화상 회의를 하고, 자녀와 함께 게임을 즐기며, 취향에 맞춘 조명과 향기로 명상을 즐긴다.

과거 집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담소를 나누던 '사랑방'의 기능이 물리적 경계를 넘어 도로 위로 확장된 셈이다.

- 삶의 질을 결정하는 '제3의 공간'

현대인에게 자동차는 집과 직장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 머무는 ‘제3의 공간’이다. 도심의 극심한 정체나 전기차 충전 시간은 더 이상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독립된 휴식 시간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시트의 안락함이나 인테리어 소재의 질감, 그리고 감성적인 UI(User Experience:사용자 경험)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소비자들은 "이 차가 얼마나 빠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 안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 이동의 끝이 아닌, 여정의 시작

자동차의 '사랑방化'는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모빌리티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차는 이제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지가 되고 있다. 가속 페달을 밟을수록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더 이상 지리적인 좌표만이 아니다.

더 깊은 소통과 더 안락한 휴식, 그리고 삶의 새로운 즐거움이라는 좌표를 향해 자동차는 오늘도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달리는 사랑방'의 시대, 우리는 이제 차 문을 열며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어서 오세요, 나의 거실에 오신 것을 무척 환영합니다."

김창권 大記者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조중동e뉴스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합니다. 본 칼럼이 열린 논의와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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