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짓밟는 입법이 아니라, 미래를 희망으로 만드는 정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필자
- 미래를 짓밟는 입법이 아니라, 미래를 희망으로 만드는 정치가 필요하다
최근 나경원 의원이 발의한 「대통령 및 고위공직자의 소년기 흉악범죄 공개 법안」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 원칙인 "인간은 성장하며 변할 수 있다는 믿음"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법안의 겉모습은 그럴듯하다. “고위공직자의 투명성 강화”라는 명분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이 법안이 실제로 제안하는 내용은, 과거 소년의 치기와 미숙함을 ‘영원한 족쇄’로 만들어 성인이 된 뒤의 삶까지 추적하고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명성의 이름을 빌린 낙인의 제도화이며, 공직 사회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하는 발상이다.
소년의 잘못을, 성인의 죄로 다시 처벌할 것인가
소년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실수하고 넘어지며 때로는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소년기의 범죄를 성인이 된 뒤 공개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잘못에 대해 사회적 사망 선고를 두 번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법은 ‘단죄’가 아니라 ‘갱생’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미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기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실수를 다시 끄집어내어 “당신은 평생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제도는, 법이 아니라 낙인의 장치다.
공직자를 향해 만든 법은 결국 모든 국민에게 적용된다
이 법안은 공직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파장은 결코 좁지 않다. 국가 차원에서 “소년기의 범죄 이력은 언제든 공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세워지는 순간,
우리 사회는 미성숙한 한 시기의 실수로 평생이 규정되는 나라가 된다. 그 피해자는 고위공직자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딛고 다시 살아보려는 수많은 청년들이다. 갱생의 기회를 잃는 것은 특정 직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 전체다.
낙인은 정의가 아니라 복수에 가깝다
공직자의 도덕성은 물론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도덕성을 검증하는 방식이 과거를 들추어 내어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소년기의 흉악범죄”라는 이름은 자극적이지만, 그 안에는 보호받지 못한 환경, 무지, 충동, 사회적 배제 같은 여러 복합적 요인이 숨어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아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돕는 것이지, 그들의 과거를 영원히 박제해 사회적 복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낙인은 정의의 도구가 아니라, 정의가 멈춘 자리에서 등장하는 감정의 폭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개’가 아니라 ‘품격’이다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투명성을 넘어 품격 있는 리더십이다. 품격은 약자를 보호하고, 미성숙했던 시절의 과오를 이해하며,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다. 과거를 낱낱이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방식은
공직자들이 더 도덕적으로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두려움에 떨고, 더 가면을 쓰고, 더 위축된 채 행동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원하는 깨끗한 공직사회와도 거리가 멀어진다.
미래를 짓밟는 입법이 아니라, 미래를 품는 정치가 필요하다
정치의 사명은 국민을 위한 ‘희망의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 희망은, 잘못한 아이가 다시 일어나 어른이 되고, 흔들리던 청년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며,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심에 두는 공동체에서만 커질 수 있다.
소년기의 그림자를 성인이 된 뒤까지 끌어내어 ‘두 번의 처벌’을 제도화하는 법안은 국가의 품격을 낮추고 사회의 역동성을 훼손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를 들추며 사람을 매장하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의 성장과 회복을 믿는 성숙한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국민을 대표하는 자의 책임이며, 미래 세대를 위한 최소한의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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