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수용과 식민지 지식인의 탄식과 향수

「카페 프란스」(󰡔學潮󰡕, 1926)는 「슬픈 印象畵」(󰡔學潮󰡕, 1926), 「파충류동물」(󰡔學潮󰡕, 1926), 「幌馬車」(󰡔朝鮮之光󰡕, 1927), 「오월 소식」(󰡔朝鮮之光󰡕, 1927) 등과 함께 정지용이 도시샤대학 유학 중에 창작한 모더니즘 시로 한국 최초의 도시시이다. 학계에서 모더니즘은 1930년대의 시운동으로 논의하고 있으나, 1926년부터 정지용은 모더니즘 시를 창작하였다. 그는 유학 중에 차별받고 억압받으면서 형성된 소외감과 상실감을 시로 형상화했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하나

카페 프란스에 가자.

--- 중략 ---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 중략 ---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모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히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아국종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이 시에는 도시의 문물을 표상하는 언어가 구사되고, 시적 자아가 느끼는 소외감과 상실감이 표출되고 있다. 京都는 당시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면서 반제국주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반역의 도시였다. 1922년 니가타현 조선인 학살 사건 이후, 京都에서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 간 연대와 식민지 해방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정지용은 京都에 살면서 도시의 상징적인 장소인 카페 프란스에 자주 간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이국적인 풍물을 보고 빼앗긴 조국과 고향의 풍물을 떠올리고 자신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그가 모더니즘 시를 쓰면서 「향수」나 「鴨川」처럼 애처로운 마음을 서술한 것은 그 때문으로 보인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원치도

않어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떠ㅅ다,

비맞이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도시샤대 정지용 시비, 2006년)

「鴨川」은 「향수」와 더불어 도시샤대학 유학 시절에 창작한 시이다. 정지용은 도시샤대학 인근에 있는 鴨川 上流를 거닐면서 ‘앉아 부질없이 돌팔매질하고 달도’ 보았고, 조선인 노동자들이 냇가에 천막을 치고 처참하게 살아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가 본 1920년대 말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모습은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1940년대 초 선친이 살았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선친은 16세의 나이에 일본에 소년공으로 끌려가서 제철공장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조선인을 2등 국민으로 차별하던 시대에 한 맺힌 세월을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다. 1945년 징병 통지까지 받았으나 해방이 되자 조국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귀환이었을까? 선친께서 술에 취할 때마다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들려주던 소년공 시절의 이야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지용은 납북 문인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대외비 자료로 취급하여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서울대 도서관 열람과의 배상채 선생과 구창현 선생이 친해서 대외비나 월북 문인들의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서울대에 없는 자료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병완 열람과장, 연세대 석현증 선생님, 고려대 신일철 도서관장의 도움을 받아 복사할 수 있었다. 정병완 열람과장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정병욱 선생님의 동생이고, 석현증 선생님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김병국 선생님의 부인이다. 신일철 도서관장은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한계전 선생님과 각별한 사이였다. 1981년 2월 지도교수인 한계전 선생님의 소개로 세 분을 만났다. 그후 자주 찾아뵙고 도움을 받았다. 1983년 정지용의 시를 분석하여 「모더니즘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한 고찰」(󰡔국어국문학󰡕 90호, 1983.12.)과 「문학사기술방법론」(󰡔국어국문학󰡕 92호, 1984. 12.)을 발표할 때 정지용이라 표기하지 않고 정O용이라 표기하였고, 정지용과 유치환의 만남이 유치환의 시의식 형성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점을 연구한 「유치환의 삶과 문학」(󰡔現代詩󰡕, 1985)을 발표할 때 역시 복자를 사용하였다. 1988년 월북 문인들이 해금되면서 「해금 시인의 작품 및 그 의미」(󰡔現代詩學󰡕 2월호, 1989), 「都市詩의 어제와 오늘」(󰡔心象󰡕 11월호, 1991), 「현대생활과 시」(󰡔心象󰡕 6월호, 1992),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사성과 변별성」(󰡔心象󰡕 3월호, 1992)을 쓰면서 정O용이 아닌 정지용으로 표기할 수 있었다.

1996년 9월부터 ‘영상문학기행’을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정지용의 생가를 답사했다.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번지의 정지용 생가는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 방향으로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다.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39번지의 정지용 문학관은 2005년 개관하였다.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들과 학생들이 몇 차례 학술답사를 한 적도 있다.

(정지용 생가, 1996)

2004년 9월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 지원 사업에 「재일동포 문학 자료 수집, 정리 및 민족주의적 성격연구」가 선정되었다. 한승옥, 소재영, 송현호, 김형규, 윤의섭, 김은영, 곽원석, 허명숙 등은 東京과 京都 그리고 大板을 방문하여 김리박, 오카야마 젠이치, 김학렬, 오향숙 등을 만났다. 민단소속의 재일동포들이 국적을 바꾸고 귀화한 사실과 조총련 소속의 동포들이 일본의 차별대우에도 국적을 바꾸지 않고 우리의 언어와 얼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정착한 그들은 당시 부여된 국적을 여전히 지니고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절감하였다. 교육과 취업 그리고 생활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심하여 힘들게 살고 있었다.

京都에 사는 김리박 시인은 일본과 한국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우리의 언어와 얼을 지키고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자주 만나면서 경계가 허물어지자 그의 집이나 카모가와의 술집에서 허물없이 술을 마셨다. 부친이 술을 마실 때마다 서럽게 불러대던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켜켜이 쌓인 한을 풀어내기도 하고 한이 서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국적을 선택하지 않고 귀화하지 않아서 국적이 조선으로 남아 있었고, 한국이나 북조선에서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적을 부여하여 그는 한국의 여권을 발급받았다. 한국인의 얼을 지킨 큰 일꾼으로 한글날 세종대왕상도 받았다. 그의 안내로 도시샤대학을 방문하여 정지용의 시비를 답사하고 카모가와 천변을 걸으면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천막을 치고 살던 장소에서 「鴨川」을 암송하기도 했다. 당시 정지용은 시인으로 최고의 경지에 있었고, 윤동주는 등단하지 않은 문학 지망생이었음에도 도시샤대학에 건립된 정지용 시비와 윤동주 시비는 위치나 규모가 달랐다. 일본인들이 윤동주를 좋아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2007년 6월 김리박 회장의 󰡔믿나라󰡕 출판기념회가 한국에서 열려 축사를 하였다. 김리박의 󰡔믿나라󰡕는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의 얼, 삶의 애환과 자긍심, 통일에 대한 열망, 주변인들의 탈식민주의적인 감정을 능란한 모국어로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민족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국에서 모국어를 사용하고 민족의 얼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일인가를 김리박 시인과 만나면서,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 책의 머리에 ‘하찮은 노래 묶음’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아주 귀중한 통일문학사의 사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다.

믿나라 출판기념회, 2007년

2008년 11월 김리박 회장이 딸의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한국에서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으니 축사를 작성해서 보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일본과 한국의 여러 행사에서 면식을 넓혀왔고, 그의 딸을 京都에 갔을 때 몇 차례 본 적이 있어서 축사를 써서 보냈다. 2015년 9월 30일 한중인문학회에서 보낸 부고를 보았다면서 모친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시를 보내왔다. 김리박 회장이 보내온 「애도」를 보고 모진 세월을 살았던 모친의 한과 재일 한국인으로 차별을 받고 살아온 김 회장의 한이 중첩되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 청석교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정태국과 정미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3년 12살 때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에 유학하여 1923년 「향수」를 썼다. 1926년 「카페 프란스」, 「파충류동물」, 「슬픈 기차」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개신교계인 도시샤대학에 입학하여 교회 입회지원서를 제출하였고, 1927년 개신교의 세례를 받고 1928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29년 3월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9월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취임했다.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33년 구인회를 결성하였다. 가톨릭청년지의 편집 고문과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상,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가톨릭 시를 발표하였고, 1935년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다. 일제강점기 창씨 개명을 끝까지 반대했고, 문인보국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1944년 폭격에 대비해 내려진 서울 소개령에 따라 부천군 소사로 이사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휘문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1945년 10월부터 이화여대 교수로 취임했다.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선문학자대회에서 좌익계 문인들에 의해 아동분과위원장과 중앙위원으로 추대되었지만, 정지용은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활동도 하지 않았다. 1946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천주교계 경향신문 주간을 맡았다. 1948년 2월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물러나 녹번동의 초당에서 서예를 하며 지냈다. 1949년 9월에는 문교부가 중등학교에서 좌익 필자 26명의 글을 삭제하도록 했는데, 이때 정지용의 시 10편이 삭제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기에 납북되어 사망하였다. 정지용은 1988년 해금 때까지 금기시됐다. 1988년 4월 지용회가 결성되었고 기념행사가 시작됐다. 1989년 5월 충북 옥천에 「향수」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2005년 5월 옥천읍 하계리에 정지용 문학관이 개관했다. 12월 도시샤대학에 「鴨川」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정지용은 1930년대 시단을 주도한 시인으로 한국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다. 그의 뛰어난 감각, 독창적 표현, 형태주의적 기법은 한국 최초의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로 명명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고어나 방언을 시어로 활용하고, 언어를 독특하게 변형시켜 자신만의 시어를 개발했다. 또 그는 가톨릭 신앙을 담은 시를 선보였다. 그는 생경한 관념의 표출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정신세계를 감각적으로 표출하여 한국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방법상의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정지용문학관)

(정지용 시인)

(필자 송현호 아주대 명예교수)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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