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사할린서 영주귀국 성경자씨 "죽기전 평양 언니 만나는 게 소원"
탄광으로 끌려온 아버지, 흩어진 가족…사할린이 남긴 '4남매의 비극'

"의사 돼서 네 다리 고쳐줄게"…동생이 평생 간직한 언니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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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성경자 할머니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지난 12일 오후 국내 최대 규모의 사할린 동포 정착 마을인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성경자 할머니. 2025. 12. 12. phyeonsoo@yna.co.kr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지난 12일 국내 최대 규모의 사할린 동포 정착 마을인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이곳엔 사할린에서 모국으로 영주귀국한 고려인 1~2세 7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날 고향마을을 방문한 김경협 재외동포청장은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경로당과 체력단련실, 노인회 사무실 등을 둘러보며 동포들의 생활을 직접 살피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팡이를 짚은 한 할머니가 김 청장의 발걸음을 막아섰다. 고려인 2세 성경자(80) 할머니였다.

성 할머니는 김 청장에게 "남과 북이 하나로 뭉치면 강대국이 된다"면서 "빨리 통일이 돼 언니를 만날 수 있게 소원을 풀어달라"며 절절히 호소했다.

김 청장은 "이재명 대통령도 남북 간 대화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언니를 만나실 수 있을 것"이라며 손을 잡았다.

말을 마친 성 할머니는 기자에게 집으로 가서 언니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이끌었다. 낯선 이방인을 서슴없이 집으로 안내할 만큼 사람이 그리웠던 듯, 할머니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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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 할머니 의견 청취하는 김경협 재외동포청장 (안산=연합뉴스) 지난 12일 오후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을 방문한 김경협(오른쪽) 재외동포청장에게 "평양에 있는 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성경자 할머니. [재외동포청 제공]

도착한 집은 정부가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에게 제공한 주공아파트 1층이었다. 복도에는 전동차가 놓여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종종 이용한다고 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2개짜리 66㎡ 정도의 아담한 보금자리. 집안 곳곳 벽면에 빼곡히 붙은 사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2019년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했다는 성 할머니는 나무 작대기로 벽면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부모님, 언니와 두 남동생, 하바롭스크 성당 지인들, 친구들 모습까지 사할린 시절의 추억이 시간의 결을 따라 붙어 있었다.

"혼자 사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화장실 갔다 나오며 이렇게 사진 보면서 함께 산다고 생각해요. 이분이 언니예요. 나보다 네 살 많아요. 지금 평양에 살고 있어요."

성 할머니가 평양의 성영자(84) 언니를 죽기 전에 꼭 만나야 한다고 말하는 데는 오래된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의 한 사고 때문이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홉 살 때 학교 앞에서 뛰어놀다가 공사장 구덩이에 빠졌어요. 엉덩뼈가 튀어나왔는데 얼마나 아팠겠어요. 막 소리 지르고 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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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설명하는 성경자 할머니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성경자 할머니가 거실 벽면에 걸어 놓은 가족사진을 나무 막대로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2025. 12. 12. phyeonsoo@yna.co.kr

때는 일본 패전 직후, 러시아 군대가 들어온 혼란기였다. 일본인 의사들은 모두 쫓겨나 치료는커녕 진찰조차 받기 어려웠다. 방치된 상처는 그대로 굳어 다리는 평생 삐뚤어졌다.

그 순간 언니가 말했다. "내가 의사가 돼서 네 다리 고쳐줄게."

언니는 공부를 잘했지만, 1960년대 아버지가 '무국적'을 선택하면서 소련 본토에 있는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졌다. 무국적으로 남은 이유는 언젠가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자녀들의 발목을 잡았다.

"사할린에는 대학이 없고, 본토로는 못 가고. 그때 북한 사람들이 와서 북한으로 오라고 막 선전했어요. 아버지는 가지 말라고 붙잡았는데."

결국 언니는 북한으로 가서 김일성대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됐다. 그 선택은 두 자매의 60년 이별의 시작이었다.

성 할머니의 부친은 1916년생으로 울산이 고향이다. 1905년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사할린 남부를 점령한 뒤, 1938년 석탄과 목재가 풍부한 사할린에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젊은 조선인 남성들은 탄광과 벌목장으로 강제 징용됐다. 할머니 부친도 이때 끌려갔다. 이후 모친이 세 살배기 언니를 업고 부친을 만나러 사할린으로 갔다.

"할머니가 엄마한테 '언니는 두고 가라'고 했대요. 근데 어떻게 놔두고 가겠어요. 그래서 업고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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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 할머니 가족사진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성경자 할머니 가족사진. 맨 위 왼쪽은 성 할머니 부친, 오른쪽은 모친이다. 2025. 12. 12. phyeonsoo@yna.co.kr

부친은 사할린에서 탄광 일을 했다. 성 할머니는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또렷이 기억했다.

"아버지 환갑 때 동네 사람들 다 오고, 맛있는 거 만들어 먹고, 춤도 추고…. 그때 아버지가 술 한 잔 마시더니 고향 생각하며 우셨던 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어머니(1924년생)는 하바롭스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두 분은 고향 울산 땅을 다시 밟지 못했고, 평양에 간 큰딸을 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해 공장에서 버터 등 유제품 만드는 일을 했다. 성당에 다녔고 세례명은 니나다. 나무로 지은 '땅집'에서 살았는데, 밭도 있고 땅도 있는 단독주택 형태라고 했다.

"우리는 빵이 밥이에요. 빵에다 국 끓여 먹고, 감자에 시금치, 양배추 넣어서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거실에는 러시아 초콜릿과 빵이 놓여 있었다. 근처에 러시아 식품점이 있어 자주 사 온다고 했다.

할머니는 기자에게 초콜릿과 프랴니키(쿠키)를 건네고, 식빵 위에 러시아 소시지를 올려 먹어보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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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연말 위문품 전달식 (안산=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지난 12일 오후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복지관에서 진행된 '2025년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연말 위문품 전달식'에서 김경협(왼쪽서 4번째) 재외동포청장이 주훈춘(왼쪽서 5번째) 안산 고향마을영주귀국자노인회장에게 위문품을 전달하고 있다. 2025. 12. 12. phyeonsoo@yna.co.kr

남동생 두 명은 아직 사할린에 남아 있다. 나이 제한으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할머니는 1945년 5월생으로 기준에 맞아 영주 귀국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장애인으로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4남매는 한국과 평양, 사할린으로 흩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생이별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다.

언니의 남편은 원자력 분야 박사였다고 했다. 모스크바에도 오갔지만, 지금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가슴 아픈 여운으로 남았다.

"저는요. 언니 생각밖에 없어요.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보고 싶어요. 언니 손자, 손녀, 조카들도 보고 싶고…."

phyeons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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