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세상만사가 관계의 순환…죽을 때까지 쓰겠다"(종합)
5년 만의 신작 '할매' 출간…"사회·문명 고찰하는 계기 되길"

"만년 작가 소망은 '백척간두 진일보'…한쪽 눈으로 버티며 글 써"

금관문화훈장 수훈에 "국가나 정부와 거리·긴장 관계 유지할 것"

X
질문에 답하는 황석영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12.9 ryousanta@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작가로서 '사람'이 빠진 소설을 쓰는 게 처음이라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써나가는 중에 '아, 이런 글을 내가 처음 쓰는구나' 하는 어떤 기쁨, 놀라움도 경험했습니다."

'한국 문학의 거목'이자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작가 황석영(81)이 5년 만에 신작 장편소설 '할매'로 돌아왔다.

황석영은 9일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할매' 집필 과정과 향후 계획 등을 밝혔다.

'할매'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던 '철도원 삼대' 이후 5년 만의 신작으로, 장구한 역사와 인간 너머의 생명으로 이야기의 지평을 한층 넓힌 소설이다.

이야기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은 군산 하제마을. 이곳에 있는 600년 된 거대한 팽나무를 이야기 소재로 삼았다.

소설은 새 한 마리의 여정으로 시작한다.

시베리아의 눈보라를 뚫고 날아온 개똥지빠귀가 금강 하구에서 죽음을 맞는다.

새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뱃속에 품고 있던 팽나무 씨앗 하나는 겨울을 견디고 싹을 틔워 마을의 수호신 '할매'가 된다.

소설은 이 팽나무를 매개로 자연과 인간의 장대한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대기근의 비극과 천주교 순교의 역사, 우금치에서 스러진 동학농민군, 새만금 갯벌과 미군기지 반대 운동까지…. 600년의 세월을 겪어온 '할매'의 깊고 묵묵한 시선을 통해 아픈 역사와 신산한 민중의 삶을 담담히 엮어낸다.

X
소설가 황석영, 신작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5.12.9 ryousanta@yna.co.kr

작품 전체를 꿰뚫는 핵심은 '인연'과 '관계의 순환'이다.

자연과 인간은 서로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으로 이어지고 기억되는 관계라는 사실을 소설은 보여준다.

황석영은 "이 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 영어로 이야기하면 릴레이션십(relationship)의 순환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만사가, 살고 죽는 것도 그러하다"며 "'할매'의 서사는 관계의 순환과 카르마의 이전(移轉)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또 "자연 세계, 사람이 아닌 세계에 대한 얘기를 쓰면서 대단히 깊은 감흥을 느꼈다. 앞으로도 여기서 더 확장된 소설을 쓰게 될 것 같다"며 "600년 된 나무가 현재 우리에게 삶과 죽음 또는 우리가 이룩해 낸 사회와 문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석영은 1962년 단편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며 등단했고, 1970년 단편소설 '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인생 60여년. 자퇴와 가출, 떠돌이 생활, 베트남전 참전, 방북, 수감생활 등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자체가 한국 현대사였으며 살아있는 문학이었다.

X
소설가 황석영, 신작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자간담회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소설가 황석영이 9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장편소설 '할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5.12.9 ryousanta@yna.co.kr

여든을 넘긴 나이, 몸은 성치 않아도 작가의 눈빛은 창작 열정으로 형형했다.

황석영은 "오른쪽 눈이 안 보인다. 한쪽 눈으로 버티는데 그래도 해보니까 (글을) 쓸만하다"며 "다음 작품을 금방 또 쓰고 싶어서 지금 움찔움찔한다"고 했다.

이어 "두세편쯤 (소설을) 더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며 "소설을 쓰기 힘들면 일기 형식으로라도 죽을 때까지 쓰려고 한다. 현역으로 노작가의 노릇을 해내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그는 "만년(晩年)의 작가의 소망은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생에서 가장 새로운 작품을 쓰고 싶다"고 강조했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도 거론됐던 그는 수상 가능성과 관련한 질문에 "노벨상이 가진 서구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또 "강대국의 패권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문화 예술을 일으켜 세워보려는 작가들과 연대하면서 새 흐름을 만들어보려 한다"며 1980년대 명맥이 끊긴 '로터스(Lotus)상'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로터스상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자유와 저항, 인권 신장에 기여한 작가에게 수여되는 국제 문학상으로 제3세계 노벨문학상으로 불렸다.

황석영은 최근 문화예술 분야 정부 포상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으로는 "하여튼 고맙게 생각한다"면서도 "국가나 정부와의 거리 그리고 긴장 관계는 유지하려 한다"고 말했다.

kihu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