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 전, 동창 카톡방에 조용히 올라온 한 줄의 공지가 한동안 잊힌 듯했던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두드렸다.
스마트폰 화면 속 글씨는 짧았지만, 그 아래로 이어진 답글들은 마치 오래된 마을 골목으로 따뜻한 불빛이 하나씩 켜져가는 것처럼 우리 가슴을 환하게 만들었다.
“나도 간다.”
“얼굴 보고 싶다.”
“살아 있다는 게 참 고맙다.”
스물다섯 명.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이 나이에 ‘모두가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날의 의미는 깊고도 충만했다.
중학생으로 리턴
🏙️ 종각에서 피어난 웃음 — 새벽 기차와 제주 바람도 모이게 한 우정
만남은 서울 종각의 한 식당에서 시작됐다.
전남 광주 친구 다섯은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올라왔고,
몸이 불편한 창만이는 제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
그 마음은 설명으로 다 채울 수 없는,
그저 보고 싶었다는 이유 하나로 움직인 발걸음이었다.
식탁 위에는 음식보다 반가움이 먼저 가득 찼다.
서로의 손등을 가만히 쥐어보는 짧은 순간에도 세월의 주름 사이로
풋풋했던 중학생 시절의 목소리가 스며 나왔다.
한 친구는 말한다.
“서울 토박이 남편은 이 만남이 뭐 그리 좋냐고 묻더라.
근데 그 사람은 모를 거야. 고향이라는 게, 친구라는 게 어떤 냄새로, 어떤 온도로 남아 있는지.”
우리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의 모양을 알고 있으니까.
📸 보신각 앞에서 잠시 멈춘 시간
식사를 마친 우리는 종각으로 걸어 나와 보신각 앞에서 오래도록 사진을 찍었다.
처음 와봤다는 친구도 있었고, 십 년 넘게 지나쳐만 다녔다는 친구도 있었다.
“서울살이 오래 했어도… 오늘은 왠지 낯설지 않네.”
그 말이 참 고왔다. 아마도 이날의 서울은 도시가 아니라 추억이 깃든 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 청계천 물길 위에서 되살아난 소년들
이어 청계천으로 향했다. 찬 기운이 돌았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걸음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월에 단련된 사람들의 발걸음은 날씨보다 서로에게 더 의지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청계천의 물은 변함없이 흘렀다.
그 물결은 오래전 우리가 지나온 세월과도 닮아 한참 동안 말없이 물을 바라보게 했다.
“물은 흐르면서도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가 되고 있었다.
도란도란 이어지는 이야기는
중학교 교실의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웃음과 다르지 않았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때의 우리를 잊으며 살아온 적은 없었다.
🍶 광장시장의 번잡함 속에서 피어난 또 한 번의 따뜻함
청계천을 쭉 내려 흐르다 광장시장에 다다랐다.
누군가가 “막걸리 한 잔 아쉽다”고 말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발걸음을 멈췄다.
복잡한 시장 골목 속, 작은 2층 식당에서 막걸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날의 하이라이트를 알렸다.
수십년만에 마음에 담았던 사연을 고백하는 친구
그 옛날,
여학생 앞에서 말도 못 붙이던 호성이는...
이제는 당당한 말투와 너털웃음을 가진 멋진 중년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참 무심하게 흘러가지만
우리에게서 완전히 빼앗아 가지는 못하는 것이 있다는 걸
이 순간 깨달았다.
🎤 노래방에서 풀어낸 못다 한 이야기들
헤어지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다. 그래서 우리는 늦게까지 노래방으로 향했다.
음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삶의 무게를 견뎌온 시간들, 말로 담지 못한 마음들은 노래 속으로 흘러나와 서로의 어깨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길에는 “정말 잘 살아왔다”는 위로가 담겨 있었다.
🌙 아쉬운 발걸음, 그러나 또 다른 약속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왠지 오래 머뭇거리게 했다.
오늘의 따뜻함이 조금만 더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서울에서 하룻밤 더 머물기로 했다.
아쉬움이 단숨에 지워질 리 없으니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이날 우리는 약속했다.
봄이 오면 제주도의 바람 아래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섬의 바람은 겨울의 매서움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부드러운 숨결로 사람들을 맞이한다고 한다.
그 바람 속을 걷다 보면 흩어졌던 시간들이 하나둘 모여 우리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것만 같을 것이다.
그날의 햇살은
오늘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들을 은은한 빛으로 다시 비춰줄 것이다.
청계천 물가에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제주의 바람결에서 또다시 되살아나고,
오랜 세월의 틈으로 잊힌 듯했던 추억들이
따뜻한 빛을 머금고 천천히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햇살 아래서
오늘의 우리처럼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래, 잘 살아왔다”고 다시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 봄은,
어쩌면 우리를 또 한 번
한곳으로 모아놓기 위해 먼 길을 건너오는 계절인지도 모른다.
지창만( 창만아 우리 제주도산 갈치 먹고싶다)
🌾 마지막 한 줄
흐르는 물에도 따뜻함이 있고,
스치는 바람에도 이야기가 있다면,
오늘의 우리는
낙엽이 타오르며 남긴 향기처럼
오래도록 그윽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친구들이여, “영원하라”고 기도하듯 말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작은 욕심일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봄꽃도 피면 지고, 강물도 흐르면 바다로 스며들어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었던 웃음과 온기,
서로의 눈빛에 스치듯 깃들었던 마음들은
비록 영원하지 않아도
쉽게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빛을 품은 채 오래도록 따뜻함으로 남을 것이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 귀하고,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선명해지는 순간들.
오늘의 우리도 그와 같은 한 페이지로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천천히 타오르며
잊히지 않는 향기가 될 것이다.
친구들의 향기가 사라지기 전에 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