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중인 박상희 농어촌 희망재단 이사장


한국 경제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IMF 시기,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워크아웃’이라는 제도를 처음 마주했다. 당시 미국 금융권에서 익숙하던 기업 구조조정 기법이 한국에 도입된 것은 불과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제도는 있었지만 사례는 없었고, 원칙은 말했지만 실제로 어떻게 기업을 살리고 회생시키는지 경험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던 그 과정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과 미국의 기업 구조조정, 다른 문화가 만든 다른 결과 한국형 워크아웃은 엄격했다. 90일 안에 확정 계획을 내야 했고, 기한을 넘기면 회생 절차가 사실상 종료됐다. 반면 미국은 훨씬 유연했다. 현장 컨설턴트는 촉망받는 기업에 대해 5년 동안 구조조정을 함께했고, 회사는 다시 일어나 재기에 성공하였다. 한 기업의 재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누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제공하느냐가 판단의 핵심이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 금융기관의 요청으로 여러 기업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한국식 기준으로 보면 부실해 보이던 기업도, 현장에서 보면 충분히 살릴 만한 곳이 많았다. 결국 한국의 구조조정 방식이 과도하게 획일적이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한국 재계의 과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재벌은 이미 충분히 성장했고, 이제는 건전한 경쟁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살아갈 길을 열어주되, 중소기업이 숨 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생산적 긴장 관계 속에서 산업 생태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재벌은 이미 충분히 컸다, 이제는 분리·독립시키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과거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대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변화는 결국 시장의 요구를 이기지 못한다.

산업의 흐름을 읽는 눈이 지역 경제를 살리는 힘이다

경제는 거대한 국가 단위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산업을 끌어오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운명도 달라진다. 서울의 코엑스와 부산 벡스코가 대표적 사례다. 지방 경제가 살아나려면 “사람과 산업이 모이는 플랫폼”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핵심이다. 필자는 과거 중소기업 전시장 유치 사업을 진행하며 이를 뼈저리게 느꼈다. 산업은 모여야 성장한다. 기업과 사람, 학회와 연구소, 전시·컨벤션이 한 공간에서 연결될 때 비로소 경제가 움직인다.

과대평가된 것처럼 보이는 프로젝트, 그러나 결국 남는 것

사업을 하다 보면, 외부에서 “과한 것 아니냐, 장난하느냐”는 시선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것이 사업가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모두 버리고 가장 기초적인 질문부터 다시 해야 한다. “지금 이게 수입이 되는가? 지출은 어떤 구조인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가? 간단히 정리하면 그렇지만, 실제로는 한밤중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야식집 조심스레 찾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숫자가 돌아간다. 사업은 외로움과 계산의 반복이다. 성공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발로 뛰는 과정이다.

지금은 정부 지원 사업도 수월해졌지만, 과거에는 지원금 한 번 받기 위해 밤을 새우며 서류를 준비하고 설명회를 다녀야 했다. “왜 하필 나냐”는 말도 들었고, “괜히 큰소리만 친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사업도 그렇다. 중소기업 전시장을 만들든, 기업을 살리든, 새로운 업을 시작하든 결국 돌아오는 건 같은 질문이다. “나는 무엇을 살리고 싶은가?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그 자문이 행동을 이끌고, 행동이 결과를 만든다.

이제 필자는 누구에게도 쉽게 말한다. “새로운 길을 찾으라”, “혁신하라”, “AI 시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IMF를 지나면서 구조조정을 배우고, 기업 회생을 경험하고, 지역 산업을 일으키는 사업을 해보며 얻은 결론은 하나다. 변화는 두려워도, 결국 가만이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사람이 이긴다. 몸을 움직이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다시 의지가 생긴다. 그 의지가 다시 한 번 삶을 앞으로 밀어준다.

<박상희 한국농어촌희망재단 이사장>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조중동e뉴스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합니다. 본 칼럼이 열린 논의와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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