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품의 아프리카인] ⑼'선비'라 불리는 남아공 태권도 6단 고수
루이스 삼육대 영문과 교수, 합기도도 5단…셰익스피어 가르치며 풍류와 사군자도 관심
"태권도 도장이 한류 시초…세계에 한국 전통무술 매력 알리려 태권도 박사 학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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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자세 취하는 남아공 출신 루이스 교수 [루이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경빈 인턴기자 =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태권도 고수가 한국 대학 강단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가르친다.
태권도 6단, 합기도 5단인 삼육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산코 루이스(47) 씨는 풍류와 사군자 등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거주하는 루이스 씨는 12일 서울시 노원구 삼육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가진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주변 사람들이 내 취향을 보고 '선비'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1994년 고국 남아공에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루이스 씨는 "어릴 적 형과 쿵푸 영화를 즐겨보며 무술에 관심을 가졌다"며 "호기심에 집 근처 태권도 도장에 등록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태권도가 한류의 시초라고 언급했다.
그는 "흔히 한류 하면 K팝이나 K컬처를 떠올리기 쉽다"며 "하지만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태권도 도장이야말로 한국을 가장 먼저 알린 주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점차 태권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루이스 씨는 "직선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는 가라테 등 다른 무술과 달리 곡선미가 돋보이는 태권도가 멋져 보였다"며 "중국, 일본 무술의 장점도 잘 녹아들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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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자세 취하는 남아공 출신 루이스 교수 [루이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루이스 씨는 한국에서 흔한 세계태권도연맹(WT·국기 태권도)이 아닌 국제태권도연맹(ITF) 태권도를 배웠다.
1966년 서울에서 육군 소장 출신 고(故) 최홍희 씨가 주도해 설립한 ITF 태권도는 품새를 '틀'이라고 하는 등 국기 태권도와 차이를 보인다.
루이스 씨는 "ITF 태권도의 '틀'은 단군, 도산, 충무 등 한국의 위인이나 관념에서 이름을 따왔다"며 "태권도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게 된다"고 설명했다.
태권도 동작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합기도와 택견도 수련했고, 전통무용과 국악까지 섭렵했다.
그는 "택견에서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인 오금질은 탈춤과 같은 전통무용에서도 나타난다"며 "그 자세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전통무용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춤의 리듬을 익히고자 장구도 직접 배웠다"고 밝혔다.
한국 전통 무술을 학문적으로 익히고자 경희대학교 태권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기도 했다.
루이스 씨는 "동아시아 철학과 전통 무술의 연관성을 연구했다"며 "관련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해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계에 한국 전통 무술을 알리는 데에도 힘썼다.
유네스코 국제무예센터와 협업해 보고서를 발간하는 한편 남아공, 중국, 영국 등 여러 국가의 무술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강연하기도 했다.
루이스 씨는 "한국 전통 무술과 철학, 문화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려는 연구를 주로 했다"며 "외국인들이 한국 전통 무술 기저에 깔린 내용들을 이해해야 흥미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은 올해 4월 국회에서 열린 원(ONE) 태권도 국제학술포럼에서 발표했을 때다.
그는 "외국인으로서 태권도 고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국회에서 강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내 연구와 업적이 인정받은 듯해 뜻깊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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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열린 원(ONE) 태권도 국제학술포럼. 왼쪽에서 세 번째가 루이스 교수 [루이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남아공 경제중심 요하네스버그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발 트라이앵글이 고향인 루이스 씨는 현지 노스웨스트대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전공했다.
그는 "원래 공대에 입학했었다"며 "그러나 첫 수업 시간에 대수학 교과서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과를 옮기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후 2006년 처음 한국행에 올랐고, 당시 서울시 강남구 소재의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영어 강사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루이스 씨는 "직장인을 가르치다 보니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수업했다"며 "한국 생활은 좋았지만, 늘 피곤함의 연속이었다"고 돌아봤다.
그렇게 1년 만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고국서 박사 학위를 준비하려던 그는 삼육대에서 제안받아 2008년부터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수업에서는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어떻게 각색됐는지 다룬다.
바이런과 셸리 등 19~20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작품을 강의하기도 한다.
그는 "최근 수업에서 사용했던 자료를 엮어 전자책(E-Book)을 냈다"며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제공한다"고 웃어 보였다.
최근에는 한국 문학에도 관심이 커져 한국 시를 아프리칸스어(남아공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이주민들이 발전시킨 토착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시로는 나태주 시인의 '시 1'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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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는 남아공 출신 루이스 교수 [촬영 임경빈 인턴기자]
루이스 씨는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을 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그는 "내가 아프리카 출신이라고 말하면 그곳에 백인이 있는지 되묻거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아프리카는 다양한 민족·문화·언어가 있는 지역임을 알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유럽계 백인'이 아닌 '남아공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루이스 씨는 "백인들은 17세기부터 남아공에 있었다"며 "내 부모님도, 나도 남아공에서 태어났다. 여권도 남아공 것만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최근 영주권(F-5)을 받은 그는 한국에서 미래를 그리고 있다.
그는 "한적한 산속에 한옥을 짓고 살고 싶다"며 "태권도와 한국 전통 철학, 문화를 집대성한 책을 내는 것이 목표"라고 포부를 드러냈다.
imkb04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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