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세상엔 쓸데없는 것 같지만 유심히 볼 것들이 많아요"
5년 만의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출간
"언어가 가리키는 대로 신나게 써"…작고한 어머니 떠올린 시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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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집 출간한 안도현 시인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최근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를 펴낸 안도현 시인이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카페꼼마 합정점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1.18 ryousanta@yna.co.kr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꽃밭에 들어가 돌을 골라내고 있는데 동무가 왔다 / 꽃밭을 높여보려고 한다니까 /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시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에서)
시인은 꽃밭을 한 뼘쯤 돋우기 위해 흙을 삽으로 떠넣어 바닥을 두툼하게 만들고 꽃을 옮겨심느라 가을 한 철을 다 보낸다. 그런 시인의 모습을 본 친구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안도현(64) 시인이 5년 만에 펴낸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에 실린 이 시는 무엇이 쓸데없는 일이고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가치란 무엇인지 곱씹게 한다. 시집 제목 역시 쓸데없음과 눈부심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같은 효과를 낸다.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카페꼼마 합정점에서 만난 시인은 "늘 유용한 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배우며 살아왔던 것 같다"며 "하지만 아주 볼품없거나 전혀 돈이 되지 않고 하찮으면서도 유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있는 시들은 남들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 쓸데없는 것들의 가치를 생각하며 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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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는 투병 끝에 2022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담은 작품들도 담겼다. 팬데믹 기간 요양병원 면회가 제한돼 어머니를 가까이서 볼 수 없었던 시인의 안타까움이 잘 묻어난다.
"유리 상자 안에 그녀가 담겨 있었다 / 밤의 요양병원을 홑이불로 뒤집어 덮고 // 틀니를 빼고 있었는데 입술을 오물거렸다 // 우리가 그녀를 위해 상자 바깥에 있는지 우리를 위해 그녀가 상자 안에 있는지"(시 '유리 상자'에서)
시인은 "어머니는 마흔 두살에 남편을 잃고 사형제를 키우시느라 고생하셨다"며 "코로나19 시기 요양병원 유리창 밖에서 어머니를 봐야 하는 단절을 겪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다만 시인이 어머니와의 이별에서 오로지 슬픔과 아쉬움만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병상에 2년이나 누워 계셨던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오히려 세상을 털어내는 시원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어 "부모는 자식을 안쓰러워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누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서로 얽어매는 관계"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제 글이나 행동이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 저는 이제 물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시 '연못 위에 쓰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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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와 안도현 시인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안도현 시인이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카페꼼마 합정점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최근 출간한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1.18 ryousanta@yna.co.kr
시인은 1985년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펴낸 이래 이번 신간까지 총 12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행으로 유명한 '너에게 묻는다', 꽃게의 시선으로 모성을 표현한 '스며드는 것', 인간 보편의 사랑을 노래한 '우리가 눈발이라면' 등의 시로 사랑받았다.
그런데도 시인은 "쓸데없이 너무 시집을 많이 낸 게 아닌가, 반성한다"며 "가끔 제가 쓴 시가 독자의 심장에 가서 꽂힐 수 있을지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말하자면 무딘 도끼로 나무를 패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또 "제가 시를 쓰기 시작한 1980년대는 사회적·역사적 현실과 시를 결합하라고 시인들에게 요구하던 시대였지만, 최근에는 시인으로서의 책무나 의무감, 무게가 줄어들었다"고 짚었다.
"이번 시집을 쓰면서 시라는 규격 속에 언어를 욱여넣지 말자, 언어가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기분 좋게, 신나게 썼죠. 분량도 제가 낸 시집 중에서는 가장 두꺼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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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 취하는 안도현 시인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안도현 시인이 지난 17일 서울 마포구 카페꼼마 합정점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1.18 ryousanta@yna.co.kr
단국대 문예창작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올해 초 교수직을 내려놓은 시인은 "저는 매년 나이를 먹는데 학생들은 늘 스무살, 스물한살이라 서로의 말을 흡수하지 못하고 튕겨내고 있다는 생각이 몇 년 전부터 들었다"고 돌아봤다.
시인은 퇴임 후 간간이 강연하면서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최근 배추를 80포기 수확해 주변에 나눠주고 있다며 미소 지었다.
그런 시인에게 다음 계획을 묻자 "내년에 동시집을 내려고 준비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인은 1996년 출간한 소설 '연어'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데서 알 수 있듯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써왔다.
시인은 "한국 문학에서는 한 작가가 한 장르만 써야 고귀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며 "글쓰기에서 작가는 장르나 양식 속에 자신을 고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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