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페미니즘 소설과 과도기 신여성의 절규

「경희」(1918)는 ‘조선 여자 친목회’의 동인지 『여자계』2호에 발표한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다. 동경유학생 경희는 아버지로부터 학업을 그만두고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그녀는 아버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아 신장을 위해 신여성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로 한다. 신여성은 부잣집에 시집가서 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사는 길이 아니라 험난하고 불확실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는 길을 가야 한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압력에 저항하는 주인공이 찾으려고 한 것은 남성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길이었다.

이 작품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여자가 공부는 뭐하러 하느냐?’는 것이다. 경희 아버지는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에 대하여 어머니는 ‘여자도 공부를 시켜야 의사가 나서 가르치지 아니한 바느질도 할 줄 알고, 존대를 받’을 수 있다고 항변한다. 사돈 마님이나 주변의 여성들은 경희에게 시집을 가서 편하게 살라고 한다. 배우지 않아도 자식 낳고 잘 살 수 있으며 오히려 많이 배우면 박복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심지어 여러 첩을 거느리지 않는 사내는 사내도 아니라고 한다. 여성 스스로 자신들을 비하하고 노예라고 고백하고 있다. 경희는 여성의 비극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여성도 배워야 하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지녔기에 평등한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항변한다. 경희는 남성들의 억압과 불평등에 대항하여 자유와 평등의 길을 찾고 있다.

1990년 대학생 연수단을 인솔하고 북경대, 자금성, 천안문광장, 유리창, 만리장성, 공자묘, 태산, 노사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노신기념관, 해안진구, 금각사, 이조성, 청수사, 사천왕사 등을 답사하면서 우리의 문화유산에 관심이 커졌다. 1995년 浙江大 교환교수로 있을 때 北京大 역사학과 출신의 黃時鑒 한국연구소 부소장이 수원 화성에 관심을 보였다. 수원에서 10년을 살았지만, 아는 것이 없어서 팔달문, 서장대, 장안문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1985년 후배들이 아주대를 방문하여 팔달문과 서장대를 구경하고, 서울 가는 길에 장안문을 본 것이 전부여서 그 이상 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1996년 4월 黃時鑒 부소장의 요청으로 한중인문학회 창립학술대회의 예산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과학원의 김준엽 이사장을 만나고,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답사했다. 동장대에서 출발하여 방화수류정, 화홍문, 장안문에 이르는 길을 사학과 박옥걸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걸었다.



1996년 9월부터 ‘영상문학기행’을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수원 화성을 일주하였다. 창룡문에서 시작하여 동장대, 방화수류정, 화홍문, 장안문, 화서문, 화령전, 나혜석 생가, 서장대, 팔달문, 수원행궁, 봉돈, 창룡문에 이르는 5.6 km의 성곽을 돌았다. 성곽은 팔달문 부근의 거리를 제외하고 거의 복원되어 있었다. 12월 한중인문학회 창립 학술대회가 끝난 후 중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학생들에게 우리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일이 시급함을 절감했다. 1997년부터 국어과 1정 자격 연수 참가 교사들을 인솔하여 수원 화성을 답사하고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서 살아 있는 현장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2001년 인문대학장 시절에는 ‘대학생활과 진로’의 현장 학습 코스로 수원 화성을 설정했고, 2004년 학생처장 시절에는 아주대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수원 화성 답사를 전교 1학년의 정규과목에 편성하였다. 아주대생들에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을 각인시켜주고 애교심을 심어주려는 취지였다.


화성 답사를 하면서 나혜석(1896∼1948)과 그녀의 화폭에 담긴 명소들에 관심이 생겼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성해방론자였다, 그녀의 생가는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47번지이다. 현재는 집이 헐리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녀는 삼일소학당(현 매향중학교 장리)을 다니면서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을 걸었고, 집 인근의 화령전을 찾곤 했다. 화령전과 화홍문에서 그림을 그렸고, ‘화홍문루’라는 시를 포함하여 6편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페미니즘적 색채가 짙은 시는 「노라」다.


나는 인형이었네

아버지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안해 인형으로

그네의 노리개이었네

(후렴)

노라를 놓아라, 순순히 놓아다고

높은 담벽을 헐고

깊은 閨門을 열고

자유의 대기 중에

노라를 놓아라

나는 사람이라네

남편의 안해 되기 전에

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

첫째로 사람이라네

나는 사람이로세

구속이 이미 끊쳤도다

자유의 길이 열렸도다

天職의 힘은 넘치네

아아 소녀들이여

깨어서 뒤를 따라오라

일어나 힘을 발하여라

새날의 광명이 빛혔네.

「노라」에서 나혜석은 여성해방론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복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삼종지도를 비판하고 자신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사람임을 절규하고 있다. 「노라」는 『매일신보』에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연재하면서 마지막 회에 나혜석에게 청탁하여 삽입한 시 「인형의 가」를 수정한 시이다. 이 시에는 소설 「경희」와 유사한 여성관이 드러나 있다.

2015년 이정화 박사, 신용철 교수, 김원모 교수, 하타노 교수, 김광휘 작가, 이자성 감독 등과 수덕사를 방문했다. 나혜석은 1920년대 수덕사 앞의 수덕여관에서 김원주와 머문 적이 있었다. 나혜석은 자유분방한 신여성이지만,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어서 출가하려고 했다. 수덕사 주지 만공스님은 김원주는 받아주었지만, 나혜석은 받아주지 않았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며 계속 자신을 받아달라고 침묵시위를 하였다. 이때 일엽 스님을 찾아온 송영업을 만났다. 송영업은 어머니 일엽 김원주의 성을 따라 김태신으로 바꾸고 나혜석의 도움을 받아 화가로 성공했으나 66살에 출가했다.

(수덕사)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다.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학지광』에 발표한 글에서 현모양처의 이상형이 여성을 노예로 만든다고 했다. 현모양처를 여성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고, 여성도 주체적인 존재로 똑바로 서야 한다고 했다. 삼종지도를 강조하던 시대에 자유로운 남녀관계와 여성해방을 부르짖었고, 「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누가 그녀의 평화를 깨뜨리고 세상을 향해 절규하도록 만들었는가? 개화기에 봉건 유습을 강요하던 남성과 제도였다. 그녀가 사랑했던 소월 최승구는 고인이 되었고, 김우영은 동경제대 출신의 엘리트 법조인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나 그녀의 진보적인 여성관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이혼했다. 자녀들은 자유분방한 그녀와 절연했다.

나혜석은 여성이기에 받아야만 했던 억압과 불평등 그리고 미움에 저항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최린과 불륜을 저지르고 손해배상 청구를 하였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과 그림 그리고 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여성의 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한 그녀는 우리에게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품행이 방정하지 못해서 돌을 맞은 여자, 욕망에 휘둘린 모던 걸의 파멸, 부도덕하고 음탕한 여자의 불행한 최후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사회로부터 지탄받고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오늘날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고 있다. 수원시에서 그녀의 생가 부근에 나혜석 시비를 세우고, 생가터에 안내판을 새기고, 인계동에 나혜석 거리를 조성하여 나혜석의 동상을 세우고 그녀의 유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불현듯 老舍가 떠올랐다. 문화혁명 때 老舍는 가장 인민적인 작가였음에도 지식분자라는 죄명으로 고깔모자를 쓰고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가족에게 외면받았다. 자아비판을 받고 귀가한 남편을 아내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고 내쫓았다. 그는 극심한 공포와 자괴감에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그해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사망하여 수상하지 못했다. 老舍를 박대한 가족들은 老舍茶館의 지원금과 老舍의 저작료를 받고 잘살고 있다. 나혜석이 재평가되고 있는 지금 그녀의 저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혜석)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