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불균형의 시작, 중국인은 한국에서 ‘무제한 혜택’, 한국은 중국에서 ‘권리 없음’
한국에서 중국인이 누리는 혜택은 사실상 무제한에 가깝다. 무비자 입국, 원정 출산, 부동산 매입, 의료·교육 서비스 접근성, 장기체류 편의까지.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개방성을 보여주는데, 중국은 그 반의 반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성의 붕괴이자 국가 품격의 문제다.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의 원칙을 상호성에서 찾았고, 칸트는 도덕 법칙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이 원칙은 처참히 뒤집힌다. 중국은 한국에서 손님이 아니라, 집주인보다 더 편하게 사는 손님이 되어버렸다. 이런 구조적 불균형을 방치한 채 ‘중국 견제’ 논의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뒤늦은 반성문이다.
Ⅱ. 한국 경제의 중국 의존은 관계가 아니라 종속의 구도다.
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을 최대 교역국으로 두었지만, 관계의 실체는 상대적 의존이 아니다. 불균형적 종속에 가깝다. 중국은 한국 기술을 흡수한 뒤 자급화를 밀어붙였고, 필요하면 사드 보복처럼 경제 보복을 휘둘렀다. 한국 기업은 한순간에 생산 라인을 잃고, 시장을 잃고, 투자 기반을 잃었다. 그러나 한국은 늘 ‘그래도 중국 시장이 크다’라는 주문처럼 스스로를 세뇌해 왔다. 문제는 시장의 크기가 아니라 리스크의 크기다. 기술과 공급망이 특정 국가에 길들수록 경제 주권은 약해진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우함으로써, 국제경제에서 타국에도 수단 취급을 허락해 왔다. 견제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존엄을 되찾는 작업이다.
Ⅲ. 안보의 아이러니, 중국은 요구는 많지만 책임은 없다.
중국은 북한 문제에서는 자신이 열쇠를 쥐었다고 과시하고, 대만·남중국해 문제에서는 한국에 중립을 요구한다. 마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이 심판이자 감독이라고 착각하는 듯한 태도다. 한국 안보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북한은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중국은 간접적 압박을 가하며, 그 사이에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이름의 강요된 침묵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약함의 신호다. 힘이 없는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 예비 굴복이다. 한국의 안보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압력과 기대에 대해 분명한 선을 세워야 한다. 그것은 도발이 아니라 자기 주권 선언이다.
Ⅳ.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 총성 없는 영향력 전쟁
중국은 한국에 아직은 총을 겨누지 않는다. 대신 말없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영향력을 확장한다. 역사 왜곡, 문화 기원 논쟁, SNS 여론 조작, 학계·경제계의 네트워크 형성은 모두 중국의 전형적인 회색지대 전략이다. 직접 충돌은 피하면서, 인식·언어·담론·정체성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가장 위험한 전쟁은 총성이 들리지 않는 전쟁이다. 한국 사회는 이 침투를 너무 오랫동안 ‘별일 아니겠지’라는 태도로 묵인해 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여론은 곧 국가 의지의 원천이다. 여론을 흔드는 행위는 국가의 뿌리를 흔드는 행위다. 견제는 적대의 선언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키는 마지막 방파제다.
Ⅴ. 기술 패권의 격전지, 한국 기술은 중국의 목표이자 도구
반도체·배터리·AI·양자·우주 기술은 21세기의 핵심 자산이다.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세계 선두권에 있으며, 중국은 이를 절실하게 원한다. 중국에 한국 기술은 두 가지 의미다. 첫째,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적 목표, 둘째, 미국 견제에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다. 한국 기술이 유출되거나 중국에 예속되는 순간, 한국의 미래는 단순히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붕괴한다.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 문제다.
Ⅵ. 규칙을 흔드는 힘의 논리, 중국이 원하는 세계는 한국에 불리하다.
중국은 국제 규칙 기반 질서보다 힘과 규모가 좌우하는 새로운 질서를 선호한다. 규칙의 세계에서는 한국이 작지만, 존중받는 주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힘의 세계에서는 국가의 크기, 인구, 군사력, 경제 규모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한국이 중국의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견제란 단순히 중국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설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Ⅶ. 좋은 이웃은 예의가 아니라 경계에서 만들어진다.
지금의 한중 관계는 마치 이런 모습과 같다. 층간소음은 윗집이 내는데, 저녁 식사는 우리가 사주는 관계,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다. 예의는 지키되 문은 잠그고, 규칙은 명확히 하고, 경계는 당당하게 세워야 좋은 이웃이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도, 의례적 외교 용어도 아니다. 국가가 국가답게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적 품격, 그리고 한국이 한국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지적·정치적 최소 조건이다.
결론은 하나다. 한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적대가 아니라 존재의 의무다.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조중동e뉴스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합니다. 본 칼럼이 열린 논의와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관련 칼럼의 경우에는 본 칼럼은 조중동 e뉴스 의견과는 별개의 견해입니다"
<저작권자(c) 조중동e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