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빈>교육가/인문학자향토문화연구가/문화재연구가
송성빈의 「이당가승」은 30년 전에 발간한 「주산가승」을 보완하여 편찬한 책이다. 「주산가승」이 동춘당에서 시종공까지의 이당 일가의 기록이라면 「이당가승」은 동춘당에서 성빈 항렬까지의 이당 일가의 기록이다.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는 이당의 일대기를 서술한 회고록이다. 이당은 「이당가승」과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에서 동춘당으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조선조 말기와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사대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의 조부 세대는 사직과 칩거, 자결과 투쟁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 민족 자본이 해체되고 폐허가 된 땅에서 우리의 부모 세대는 뿌리 뽑힌 삶을 살았다. 조선조를 지탱했던 사대부가의 전통이 부정되고 국권 상실 후 반상의 윤리도 무너져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동일화 전략을 구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心火를 끓이면서 배출구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았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의 화풀이 대상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주눅 들어 살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세대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배움을 이어가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산업화도 이루고 민주화도 이루었다. 나아가 부모 세대들이 부정하던 우리의 전통과 뿌리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 선조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해나가고 있다. 염상섭의 「삼대」, 채만식의 「태평천하」, 안수길의 「북간도」,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족사 소설이다. 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보아야 할 가족사 소설이 박경리의 「토지」이다.
박경리의 「토지」는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1897년 추석으로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의 최씨 일가 4대의 삶을 통하여 대한제국 말에서 해방까지 우리 민족사를 조명한 5부작 가족사 소설이다. 한국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계층의 인간들이 등장하는 까닭에 이야기의 중심에 존재하는 인물들보다는 그들이 어울려 사는 역사와 사회를 주인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저마다 개성 있게 등장하면서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어서 최씨 집안의 몰락과 재기 역시 한민족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표제를 ‘토지’로 설정한 것은 우리 민족의 땅에 대한 집착과 애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고, 최씨 가문과 평사리 주민들의 시련과 그 극복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암시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송성빈의 「이당가승」과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는 이당의 직계 12대의 삶을 통하여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서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우리 민족사를 기록한 가족사다. 가족사 소설은 허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서술한다면 가족사는 실재하는 인물의 기록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가족사 소설과 가족사는 허구와 역사라는 변별성을 지닌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작가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서술하건 사실에 바탕을 두고 서술하건 국운이 기울어지고 신분질서가 무너져가던 당대의 현실을 재현하여 현재의 징후를 파악하고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유사하다.
「이당가승」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이당의 직계 선조인 문정공 준길, 정랑공 광식, 송월당공 병익, 학성공 요필, 통덕랑공 숙흠, 율수제공 후연, 판관공 계근, 서령공 돈희, 익위공 창노, 시공공 종국에 대한 기록이다. 조상의 기록을 찾는 일은 알렉스 헤일리의 조상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여정이다. 알렉스 헤일리는 조모 베르사로부터 끊임없이 가족의 역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아프리카 대륙은 특정 마을의 역사를 암기하고 암송하는 훈련을 받은 구술 사학자가 존재했고, 미국이나 영국은 문서가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구술 사학자도 없고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다. 다행히 문중과 향토 연구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송진도 씨가 편찬한 「은진송씨문헌록」의 묘도문을 참조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2부는 1916년생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동족상잔과 4.19 학생혁명, 5.16 군사정변과 민주정권에 이르기까지의 격동기를 살다간 포천공의 형제들과 조카들에 대한 추도사와 회고담 형식의 기록이다. 3부는 은송 지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는 포천공 택순의 차남인 이당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동춘당 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은 조선조 후기 주자학의 대가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예론에서 승리한 이후 남인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일찍 소천했다. 동춘당의 사대부의 기개와 문장은 후대로 이어져 정랑공 광식은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요절하였다. 송월당공 병익은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흉년이 들어 고통받는 고을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율수재공 후연은 김제군수로 있다 파직하였으나 선산 도호부사로 승진하였다. 정조는 재임 중에 사고가 없었음에도 파직당한 사람이 있으니 다시 불러 쓰라고 하였고, 율수재공은 전생서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판관공 계근은 의금부 도사와 전쟁서 판관을 거쳐 목천 현감이 되었다. 재임 중 치적이 많았으나 소천하였다. 익위공 창노는 세자익위사 좌익위로 있다가 황간 현감이 되었으나 국운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다가 소천하였다. 시종공 종국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유배 길의 영친왕을 배송하고 일본으로 가라는 명을 받들지 않고 낙향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후 이당의 가족사는 포천공 택순 형제들과 자녀들에 대한 추도사와 회고담,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강화도조약,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일제는 민족 자본의 해체와 함께 조선인들을 억압하여 노예처럼 살게 하였다. 해방 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인의 삶의 터전은 잿더미가 되었다. 폐허가 된 줄미에서 포천공은 동춘당의 후예로 자긍심이 강했으나 뿌리 뽑힌 삶을 살았다.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마음의 화를 다스리기 어려웠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이웃에게는 관대했지만 문중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는 폭군이 되었다. 사대부가의 가장들이 그렇듯 머리 좋은 딸들의 교육에는 야속할 정도로 무관심하였다.
격동기의 극한 상황 속에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많은 서원(회덕 숭현서원, 공주 충현서원, 봉암서원, 연산 돈암서원, 용강서원, 창주서원, 흥암서원, 성천서원 등)에 제향된 동춘당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암울한 시대가 만든 폭군인 포천공 사이에서 주눅들어 살던 이당이 어떻게 성장해가고 변모해가는가를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다. 수몰지가 된 대전시 동구 주산동 줄미에서 자란 형제들과 친구들의 이야기, 상처를 준 부친과 가슴 아픈 모친의 이야기, 성장 과정에서 만나 인연을 맺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의 이야기, 문중과 향토 연구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당이 자신을 얽매었던 속박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고 해방되는가를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당가승」과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는 「토지」에 비하여 역사적인 사건이 많고 시간적인 길이와 너비가 크다. 「토지」가 최씨 일가의 몰락과 재기라는 서사를 국권의 상실과 회복이라는 서사와 엮은 것이라면 「이당가승」과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는 북벌론과 반정공신들의 밀고, 예송논쟁과 당쟁, 유배와 사사,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외세의 침략과 외척의 발호, 국권 상실과 사직, 낙향과 칩거, 수몰과 실향이라는 여러 서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당가승」과 「왕따 도련님의 해방일지」를 제재로 가족사 소설을 서술한다면 「토지」보다 재미가 있고, 방대한 민족의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인물들을 저마다 개성 있게 등장시키면서 시대사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동춘당의 가족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사대부가의 역사를 조망해볼 수 있는 좋은 제재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송성빈 향토문화 연구가
송성빈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대전고 충남고 유성고 충남여고 등에서 37년간 교사로 봉직했다. 은진송씨 종보 편집위원이며 향토사학자이다. 동춘당 송준길의 현손인 늑천 송명흠이 옥과 현감으로 부임하여 1756년(영조32) 옥과향교를 전남 옥과현 화석면 율정에서 옥과현 현내면 옥과리(현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14-1번지)로 이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옥과향교에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이 봉안되어 있다.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학교 교무부처장 인문대학장 학생처장 인문과학연구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춘원연구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1993년부터 北京大, 浙江大, 复旦大, 南京大, 中山大, 辽宁大, 武汉大, 山东大, 延边大, 吉林大, 中央民族大, 中国海洋大, 华中师大, 浙江越秀外大, 吉林大 珠海学院, 河北大, 天津師大, 安徽财经大의 한국학진흥사업을 자문해왔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과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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