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예술 공간으로 거듭난 어둠의 군사 벙커
국립현대미술관, 1973년 만든 청주 당산 벙커에 설치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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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람 작 '비밀의 추'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청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어둡고 습한 터널에 들어서자 천장에 매달린 전구들이 흔들리며 빛을 냈다. 마치 강한 바람이 불거나 지진으로 땅이 요동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구슬처럼 작지만, 날카로운 빛을 내는 전구들은 숨겨진 비밀 공간이 드러날까 봐 외부 위협에 맞서 방어 태세를 취한 작은 짐승의 송곳니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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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당산 생각의 벙커' 입구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충북 청주시에 있는 당산 벙커는 50년간 전쟁 대비 군사시설로 사용된 시설이다. 1973년 충북도청에서 250m 떨어진 당산 암반을 깎아 폭 4m, 높이 5.2m, 길이 200m 규모로 지하 벙커를 조성해 충무 시설로 활용했다.
몇 년 전 안전 점검에서 C등급 판정을 받자 충북도는 충무 시설을 이전했고 2023년 일반에 개방하며 '당산 생각의 벙커'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충북도, 청주시립미술관과 협력해 이곳을 예술 공간으로 꾸미고 '벙커: 어둠에서 빛으로'전을 열고 있다.
길이 200m의 지하 벙커 길을 따라 양옆에 마련된 공간을 전시실로 활용해 김기성, 박기진, 신형섭, 염지혜, 유화수, 이병찬, 전수천, 최우람 등 작가 8명과 각각 팀으로 활동하는 사일로랩 및 장민승·정재일 작가가 참여해 설치작품 12점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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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천 작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흔들리는 작품은 최우람의 '비밀의 추'다.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개관전 '신호탄'에 설치됐던 작업물이다. 과거 기무사 건물이었던 전시 공간의 장소성과 그곳에 스며든 '비밀'의 개념을 향로 형태의 전구 진동으로 표현했다.
대표작은 전수천(1947∼2018)의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 - 그 한국인의 정신'이다. 한국 현대 설치미술의 개척자로 불리는 전수천은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 베네치아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았다. 이번에 전시한 것은 전수천이 특별상을 받은 1995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한국관에 설치했던 작품이다.
흙으로 빚은 인형 '토우'를 중심에 두고, 산업 폐기물, 유리, 조명, 영상 등을 결합해 고대와 현대, 자연과 기계가 교차하는 공간을 연출한다. 문명의 이면을 성찰하며 인간의 욕망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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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진 작 '미지' (청주=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청주 '당산 생각의 벙커' 안에 설치된 박기진 작 '미지'. 2025.10.19. laecorp@yna.co.kr
박기진의 '미지'는 벙커라는 공간에 어울리는 작품이다. 2000년대 초 비무장지대(DMZ)에서 포병 관측장교로 복무한 작가는 전시실 안에 나무로 참호를 만들었다. 관람객은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며 불안감과 긴장감을 체험한다. 하지만 참호 끝에 다다르면 DMZ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며 현실과 허구, 기억과 세계가 뒤엉킨 공간에 놓이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겹침을 통해 '나'라는 존재와 세계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병찬의 '플라스틱 유기체'는 플라스틱 비닐로 만든 괴생명체다. 작가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필수품인 비닐로 화려하지만 조악한 외계 생명체를 만들었다. 공기를 주입해 들숨과 날숨을 내쉬지만 관람자가 작품 내부의 문을 열면 호흡이 붕괴하면서 숨이 빠져나가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이는 자본의 흐름과 그 불안정한 구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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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찬 작 '플라스틱 유기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기성의 영상작품 '봉명주공, 장면들'은 청주의 1세대 아파트 단지 '봉명주공'의 마지막 사계절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1983년 청주 봉명동에 지어진 봉명주공 1단지는 2020년 봄 재개발 공사로 철거됐다. 작품은 나무를 중심으로 사람과 기억, 관계 등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묵묵히 포착한다. 아파트가 인간의 삶의 터전이자 동시에 동식물의 서식지임을 일깨운다.
이 밖에도 바비큐 그릴이나 쓰레기통 등 일상 사물에 카메라 렌즈를 결합한 신형섭의 이미지 장치 연작 '아르고스 판옵테스'와 사라진 잡초를 다시 재배하는 유화수의 '잡초의 자리', 신라시대 인공 숲 '상림'에서 착안한 장민승·정재일의 미디어 설치 작업 '상림' 등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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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성 작 '봉명주공, 장면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laecorp@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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