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 입구에서

[조중동e뉴스=이금희 기자]
— 12월의 1박 2일, 사람을 만나는 여행

12월 27일 정오부터 28일까지, 고향의 선후배들과 함께한 1박 2일의 시간은
여행이라 부르기엔 너무 깊었고,
모임이라 하기엔 너무 오래 묵혀온 세월을 품고 있었다.

곡성군 옥과면 금의리.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조용히 저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는 50년, 60년 만에 얼굴을 마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살던 시절, 학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쳐도 다행이었고
열여섯, 열일곱의 나이에 서울로, 부산으로 떠나는 일은
꿈을 좇는 일이 아니라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향과 작별 아닌 작별을 했다.
그 이별이 수십 년이 될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청주 외곽, ‘잉카의 제국’이라 불리는 별장에 스무 명 남짓이 모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누군가는 웃음과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야, 네가 그 ○○ 맞냐?”

그 한마디로 60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각자의 삶은 달랐지만,
그 출발점은 모두 같은 황토길이었다.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남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날들,
가슴속에만 묻어두었던 사연들,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기억들이
술잔과 함께 조용히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어느새 우리는
미움도, 시기도, 다툼도
다 내려놓은 나이가 되어 있었다.
예순을 넘고, 일흔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위로였다.

사람은,
어쩌면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풍성한 식탁


풍성한 식탁, 풍성한 마음

식탁은 차고 넘쳤다.
서울에서, 광주에서, 광양에서,
저 멀리 부산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친구들이
각자의 고장에서 가져온 특산물들을 보따리째 풀어놓았다.

어릴 적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풍경이었다.
그 시절, 배부르게 먹는다는 건
꿈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웃음이 오가고,
“그때 말이야…”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이 따위는 이 자리에서 논할 주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그저
해맑은 얼굴로 돌아간 시골 아이들이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법주사에서 만난 시간의 결

오후에는 속리산 자락의 법주사를 찾았다.
누군가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누군가는 50여 년 전 수학여행으로 스쳐 지나갔던 곳이었다.

초겨울의 법주사는 생각보다 사람들로 붐볐다.
한 친구는 55년 전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듯
카메라 앵글을 이리저리 맞춰보았다.

천년 고찰의 고요 속에서
우리의 말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그 모습이 왠지 애틋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이라 해봐야
도시락 하나 들고 동네 산이나 절로 가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설레는 하루이기도 했다.

천년 고찰의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말수가 줄었고,
각자의 기억 속으로 잠시 걸어 들어갔다.

긴 겨울밤, 더 길어진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숙소로 돌아온 밤,
시간은 다시 느리게 흘렀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버텨낸 나날들,
그 시절에는 몰랐던 서로의 속사정,
지금에서야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밤을 채웠다.

사회에서 만난 그 어떤 인연보다도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추억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분명
축복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그 무게를 함께 견뎌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축복받은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시절을 함께 지나왔기에,
그 속에서 자란 끈끈한 정은
어디에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겨울밤은 길었고,
우리의 이야기는 별들이 힘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청남대, 풍경과 불편함의 사이

봉황탑 에서


다음 날 아침,
시원한 명태국으로 속을 풀고
우리는 청남대로 향했다.

한때 대통령들의 여름 휴양지였던 곳.
이제는 충청북도로 이관되어
일반인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이승만 정권부터 이어지는 기록과 동상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그중에는
차마 마음 편히 바라보기 어려운 얼굴들도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


솔직히 말해
마음속으로는 모두 치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들었다.

봉황탑에 오르는 계단은 제법 가팔랐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고
단번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며
‘역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황탑에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청남대의 풍경은
왜 이곳이 대통령들의 휴양지였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고도 남았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음악분수,
솔바람길을 지나
대통령 기록관까지 둘러보았지만
가이드는 하루를 꼬박 써야 다 볼 수 있다고 했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두 시간의 여정에 만족해야 했다.

다시, 각자의 삶으로

점심은 특별했다.
얼마 전 딸을 시집보낸 친구가
기꺼이 대접을 자청했다.

닭 볶음탕



대형 솥에 닭을 잡아
갖은 양념을 더해 끓여낸 볶음탕.
그 국물에 밥을 볶아 먹는 맛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품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는 닭 볶음탕



이제 1박 2일의 여정이 끝나간다.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다.

즐거운 점심식사




“내년에 또 보자.”
그 말 속에는
슬픔과 희망이 함께 섞여 있었다.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못다 한 이야기들을
다시 엮어갈 것이다.

웃으며 악수했지만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삶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이 여행은 끝났어도,
이 시간은 오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다시 살아 숨 쉴 것이다.

[조중동e뉴스=이금희 기자 동행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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