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전쟁 체험과 미국의 한인 여성 페스탈로치
Dr. Chung Wha Lee의 「The Korean War Witnessed by a teenage girl」은 팔순이 넘은 여덟 명의 재미 한국인의 회고록인 『The Forgotten War of 1950』(KDP Amazon.com, 2021)에 수록된 글이다. 6월 25일 공산당의 대대적 남침으로 인심은 흉흉했으나 국군이 막아낼 것으로 생각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가던 소녀 가족의 일상사에서부터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 공산당 치하 3개월의 참혹상을 집중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마지막 장은 부산 피난 시절에서부터 미국에서 종전 소식을 듣기까지의 평화의 소중함을 서술한 글이다.
6월 25일 15세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평온했다. 친구의 방문, 병석의 부친과 의사인 모친의 일상적인 삶을 서술하고 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27일부터다. 모친은 병석의 부친을 제외하고 자식들만 피난시키려고 했다. 오빠는 부친을 먼저 피신시키자고 반발했다. 부친을 두고 떠날 수 없어서 다섯 식구는 서울에 남았다. 공산당 치하의 세상은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부친은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 선동죄로 체포되고, 해방 후에는 일본에 협력했다고 체포되고, 공산당 치하에서는 서방 민주주의 동조자라고 체포되었다. 오빠는 자하문 바위굴에서 숨어 지내다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모친의 아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게 서술되고 있다. 내무서원들의 강요로 집을 비우면서 창틀을 뜯어내고 오빠를 탈출시키고, 소녀는 돈을 강탈당했다. 반동으로 몰린 가족을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억압과 공포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방공호에 피신하면서 매일 마포형무소에 투옥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어느 날 공산주의 신문에 범죄인 재판을 공지하여 투옥된 부친을 찾아 나섰다. 간수가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고 했으나 속임수였다. 후퇴하는 공산당원은 30만 원을 받고 체포된 의사를 풀어주었고, 동원령으로 시민들을 핍박했다. 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잊고 지내다 수복 후에야 납치된 부친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부산으로 피난해서는 모친의 병원에서 간호보조원의 일을 하다가 이화여고 부산 임시 학교에서 공부했다. 1952년 한국 학생대표로 선발되어 미국 뉴욕 Herald Tribune이 주최한 ‘World We Want’ 세계 고교생 forum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백악관에서 헤리 트루먼 대통령, FBI본부에서 존 에드거 후버 국장,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에버린 벡커 멕쿤 여사를 만났다.
17세의 소녀 이정화는 포럼 참가자인 일본 학생을 만났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일본어 대화를 거부했다. 일본 학생이 일본인들의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을 이야기하자 대화를 하고 친구가 되었다. 연설문에는 일본 학생과 친구가 되는 과정,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본의 침략과 억압에 대한 기억, 6.25 전쟁의 참혹상과 부친의 납북, 평화에 대한 열망이 담겼다. 연설회장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 가족들이 많이 참석했고, 그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장경근 국회의원의 「외교관보다 큰 성과를 올리던 이정화 양」(『그리운 아버님 춘원』, 우신사, 1955)에 의하면 미국 체류 기간 다른 나라 대표들은 2회, 3회 정도 연설을 했으나 이정화는 30여 회의 연설을 했다. 이화여고를 졸업한 그녀는 1952년 가을 언니와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11년 동안 가족 얼굴도 못 보고 살았다. 부친이 준 신약성서와 염주가 납북된 부친과 이정화 박사를 연결해 주는 유일한 물질적 연결고리였다.
2018년 10월 연수 중이던 딸의 초청으로 뉴욕에 머물다가 필라델피아에 갔다. 필라델피아 기차역에서 이정화 박사를 만나 독립기념관을 답사했다. 『신한자유종』의 삽화에 들어간 자유종의 실물을 확인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의 조각상을 구경했다. 이정화 박사의 자택을 둘러보고 기차역 인근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 박사의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들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이정화 박사가 필라델피아에 정착한 이유와 자유종을 보고 춘원을 떠올린 적이 있는지 묻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2019년 4월 춘원연구학회에서 上海와 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을 답사하고, 浙江大 한국연구소의 협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축사는 이정화 CCEC 대표, 金健人 浙江大 한국연구소장이, 개회사는 송현호 회장이, 기조 강연은 신용철, 최기영 교수가, 논문발표는 방민호, 김형규, 석형락, 공임순, 정진석, 서은혜, 김주현, 곽명숙, 최주한, 이유진, 정홍섭, 송민호, 이경재, 민병진, 김명숙, 한홍화 등 20여 명의 교수가 하였다. 후원자인 배화승 회장, 학회 발전에 공로가 큰 신문순 간사, 김광휘 작가, 윤덕순 고문, 이자성 KBS 영상감독, 태학사 지현구 사장 등이 동행했다.
2025년 10월 이자성 영상감독이 이정화 박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미국에 간다고 해서 몇 가지 주문을 하였다. 이자성 영상감독은 미주한국전통문화연구원 엄종열 원장 부부, 최상준 교수, 이향란 여사, Julie 여사와 동행하여 이정화 박사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들은 1919년 4월 16일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등이 한인대회 때 행진했던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으로 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독립기념관과 한인 학교가 있던 Chaltenham 지역을 답사하고 메모와 사진을 나에게 보내왔다. 1984년 설립한 한인 학교는 현재 폐쇄되었다. 한국인들이 사회적으로 위상이 높아져서 좋은 곳으로 이주했고, 이민자와 그 후손들에 대한 한국문화 교육을 지역 교회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춘원은 1904년 일본 관헌의 동학교도 탄압으로 상경하여 동학교당에서 일했고, 1905년 동학 교주 손병희의 추천을 받아 일진회 사비 유학생으로 大城中學에 진학했다. 1906년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경성의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복학하여 明治學院에 편입하였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 초청으로 도쿄에서 열린 도산의 애국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그해 소년회를 만들어 민족의식을 담은 글들을 써서 1908년 「신한자유종」 창간호를 출간하였다. 1910년 4월 3호를 발간한 후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경시청에 불려가 심문을 받고 책을 압수당했다. 압수된 책은 대한제국 경무국장을 지낸 마츠이 시계루(松井繁)가 소장하고 있다가 국립공문서관으로 이관되어 ‘마츠이박사기념문고’에 보관되어 있었다.(하타노 세츠코,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 푸른역사, 2016). 책의 표지에 자유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아 자유종을 치는 수군 병사를 무궁화 꽃송이가 에워싸고 있는 삽화가 있고 상단 우측에 극비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순신과 거북선이 그린 권두 삽화, 옥중의 안중근을 그린 권두 삽화와 격렬한 어조의 시, 논설문, 잡기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자유종은 미국 독립의 상징물이다. 이순신과 거북선은 한국인의 민족적 우월성을, 안중근은 독립 의지를, 발행일시를 융희로 표기한 것은 민족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신한자유종』3호의 표지, 융희 4년(1910년) 4월 1일
『신한자유종』3호의 이순신과 거북선 권두 삽화
남강 이승훈은 도산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군 용동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동회 조직을 만들고, 민족교육과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춘원은 오산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면서 용동에서 야학과 동회 일에 헌신하였다. 1914년 1월 신규식은 춘원을 미주 신한민보의 주필로 임명했다. 그의 추천으로 해삼위의 이종호와 길림성의 이갑을 만났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돈이 없었다. 춘원은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미국에 가지 못했다. 해삼위의 권업회에서 운영하는 『권업신문』에 애국적인 글을 발표하고, 치타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기관지 『대한인정교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1915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했고, 1917년 「무정」을 발표했다. 춘원은 언더우드를 미국의 페스탈로치, 도산을 조선의 페스탈로치로 보고 무정한 세상을 유정한 세상으로 변혁시킬 수많은 페스탈로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무정」에서 이형식과 김선형은 시카고대에서 공부하고 귀국을 준비한다.
1918년 12월 동경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 작성 기초위원으로 백관수, 김도연, 이광수를 선임했다. 이광수는 1919년 2월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일제에 대한 투쟁을 선포하였다. 「2․8독립선언서」는 송계백이 국내의 지사들에게 전달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광수가 上海의 신한청년단에 전달하여 불란서 조계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광수는 2.8독립운동 대표로 사료편찬위원회 주임 겸 「독립신문」의 사장을 맡았다. 그는 애국적인 글을 「독립신문」에 발표하고 「독립운동방략」을 작성하였다. 1920년 도산은 영국 조계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설립하여 이광수, 주요한 등을 입단시켰다. 이광수는 공식적으로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1호 단원이었다.
(도산의 딸 수잔이 보내준 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 흥사단 사진)
도산은 1907년 신민회 시절부터 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 이르기까지 연통제를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고 운영자금을 모집하였다. 1921년 국내의 비밀조직이 경찰에 발각되었고,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의 연통제가 해체되었다. 춘원은 1921년 국내로 돌아와서 민족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하다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연재가 중단되고 출판 금지되었다. 1922년 수양동맹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 동우구락부와 합하여 수양동우회로 개명했다가 1929년 국외의 흥사단과 합하여 동우회로 개명하였다. 이들은 수양운동단체였지만 민족운동의 전진 기지로 연통제의 역할을 했다.
1937년 도산과 춘원을 포함하여 동우회 회원 183명이 체포되었다. 송진우와 김동원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는 살생부가 나돌던 살벌한 전시 상황이었다. 1938년 11월 동우 회원들은 사상전향서를 재판소에 넘겼다. 1938년 12월 8일 초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검사는 전향으로 모든 죄를 덮을 수 없다고 즉시 항고하였다.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 제2심 동우회 사건 재판에서 춘원에게 최고형인 5년, 주요한에게 4년, 조병옥에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1941년 11월 17일 3심 재판에서 검사는 ‘조선 청년의 칠 내지 팔 할이 피고의 저서에서 감염’되었다면서 ‘이광수는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하였고, ‘피고가 근래에 천황 중심을 말하고 내선일체를 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그의 민족운동의 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 시국에서는 그러한 형식이 아니고는 민족운동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3심은 파기 환송되었으나 춘원의 모든 책이 발행 및 판매 금지되었다.
검사의 공소장은 춘원의 전향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검사의 공소장이 사실에 바탕을 둔 주장임은 학병과 정신대 권유연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복회 회장을 역임한 김우전은 학병 권유 강연장에서 들은 것이 화랑, 이순신, 거북선, 군대기술이었고, 자신도 군대에 입대하여 기술을 배운 후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가입했다고 증언했다.(KBS 이자성 영상감독이 김우전 회장을 인터뷰한 영상을 2017년 9월 23일 학술대회장에서 방영한 바 있다.) 신용현은 춘원이 1944년 8월 농촌정신대와 청년정신대를 만들어 항일독립운동을 했다고 『신태양』(1954)에 증언한 바 있다. 재판이 종결되었으나 경찰과 검찰은 여전히 춘원과 동우 회원들을 죄인 취급하였다.
김구는 동우회의 와해로 국내의 모든 연락망이 차단되어 국내 인사들의 협조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에 잠입시킬 준비를 했다.(「최보식이 만난 사람- 92세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 조선일보, 2014. 10.20.) 동우회 사건은 일제의 정치적 탄압의 대표적 사례이며, 살생부가 나돌면서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이다. 일본의 야만이 최악에 달한 일제 말기 굴절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작가들을 유교적 시각에서 단죄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박경리는 일본은 힘에 의한 경쟁 사회로, 유교의 문명원리에서 보면 野蠻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국내와 주변국 사람들의 이성을 짓밟은 역사를 가진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저의 작업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용직 회장의 요청으로 춘원연구학회에 가입하여 일제 말기를 체험한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당시의 자료를 보면서 많은 의문이 생겼다. 1914년 미국에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재필이나 안창호의 길을 걸었을까?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민족을 생각했던 식민지 지식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춘원 문단생활 20년을 기회로 한 문단 회고 좌담회」(『삼천리』, 1934.11, 240면)와 「나의 고백」에서 춘원이 소년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하고 회람잡지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일본 학자가 당시의 자료를 발굴했다. 춘원이 1921년 국내에 귀환했을 때 사람들은 일제의 회유로 귀국했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귀국하여 그가 한 일을 민족계몽을 위한 집필활동을 하고 흥사단 계열의 수양운동단체를 만들어 민족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춘원이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친일을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일본 검사의 공소장이 발견되었다.
1952년 이정화는 미국으로 가서 학업에 매진하였고, 필라델피아에 정착하였다. 인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생화학자 Iyengar와 결혼했다. 어쩌면 이정화는 아이엥가에게서 부친의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주한미군과 결혼했다가 가정파탄을 경험한 한국인 여성들을 돕고, 법률적 지원을 했다. Korean American Community Development Services Center(KCDSC) 에서 이민 온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 박사는 어린이들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고 증언했다.
최상준 교수의 부인 이향란 여사는 이정화 박사가 교포들이 천박하다고 외면하던 국제부인들을 교양의 수준, 언어,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하고,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였다. 이정화 박사는 1982년 Philadelphia 시에서 주는 Human Rights Award Commission on Human Relations를 수상했고, 1984년 필라델피아에 한인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아 부친 춘원이 소망하던 한인 여성 페스탈로치가 되었다.
(Human Rights Award Commission on Human Relations, 1982년)
현재 Korean Community Development Services Center(KCDSC), Towson University Asian Arts & Culture Center,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ICAS), Korean Heritage Research Asso, 춘원연구학회 등에 기부금을 내고 있다. 막내딸 Tara는 이정화 박사를 진정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이정화 박사는 한국인, 인도인, 미국인이라는 3개의 짐을 지고 살아온 과학자다. 한국인의 짐이 가장 크고, 무거워 보였다. 아버지는 글로 조선의 혼을 일깨웠고, 딸은 행동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필라델피아에 유학한 최상준 교수 부부는 Chaltenham에서 이정화 박사와 인연을 맺었다. 한국에서 교사였던 이향란 여사는 한인 학교의 한국어 교사로, 최상준 박사는 운전을 비롯한 잡다한 일을 했다. 춘원이 소망하던 미국에서의 삶과 조선인 페스탈로치의 역할을 막내딸 이정화 박사가 필라델피아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정화 박사는 Chatham 대학교(전 Pennsylvania 여자대학교)에서 화학 학사, Pittsburgh 대학교에서 생화학 학사, Bryn Mawr 대학교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Agnes Irwin 학교 교사, Pennsylvania 대학원 연구원, Pennsylvania 대학교 의대 연구원, Pennsylvania 대학교 수의대 연구원, 경상대학교 부교수, Philadelphia 한인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수의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1952 Herald Tribune ‘World We Want’ forum 한국 대표, 1959 인도의 독립운동가이고 생화학자인 Melkote R. Iyengar 교수와 결혼. 1981년 새싹회 번역문학상 수상, 1982년 Philadelphia시 인권옹호상 수상, 현재 CCEC 대표, KCDSC 이사이다.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춘원연구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춘원연구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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