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하기보다 누군가를 위해 작게라도 나누고 베풀며 살고자하는 필자
- 나를 알아주는 세상보다 남을 알아주는 세상을 만들자
사람 냄새가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방에서 여럿이 한이불 덮으며 잠을 자면서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뜨거워지던 가족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밥 한끼 나눠 먹는 사이에 가족보다 진한 정이 오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황당한 현실 앞에서 문득 마음이 멎는다. 이제 세상은 사람보다 반려견이, 부모보다 반려동물이 더 우대받는 시대가 도래된지 오래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멈추는 사이 반려동물을 위한 유치원, 호텔, 장례식장이 성행한다. 이제 사람아닌 반려견 학교가 생겨난다 해도 당연한 시대에 살고있다. 죽은 반려동물을 위해 사람이 조문하고, 화장 봉안당에는 반려동물 영정사진이 빛난다. 정작 사람은 그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홀로, 조용히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텅 비어가는 사람으로 흘러가고 있다. 1인 가구는 넘쳐나는데, 인구는 줄어들고 아기 울음 대신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어느덧 혼자 견디는 외로움만 쌓여가고, 반려동물이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
AI나 인터넷으로 배울 곳은 넘치나는데, 가르칠 이도, 배우려는 이도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인간관계는 사라진 예의, 사라진 의례, 사라진 사람으로 고독속에 군중으로 사로잡혀 가고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쉬워졌지만 늙은 부모를 모시는 자식은 흔치 않고, 가난한 부모는 설 자리가 없다. 집들이도 사라지고, 생일·잔치도 사라지면서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한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이제 장식에 불과하고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예식장엔 주례는 없어지고 축하를 빙자한 소음만 들리고, 하객들은 식권만 챙겨 식당으로 향한다. 장례식장은 조문객들은 없고, 조의금은 무인자동화로 상주에게 입금만 된다. 한 줌의 재가 납골당에 안치되면 생의 마지막이 끝난다. 이쯤 되면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남은 생을 더욱 즐겁고 행복을 나누며 살아가고자 하는 필자(중앙에선 남자)
우리는 정녕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도, 사람은 사람임을 잊지 말자. 도덕과 예의조차 사라진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을까. 멀지도 않은, 전설이라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그 시절엔 돈보다 사람이 먼저였고,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유모차는 반려동물용이 더 많이 팔리고 기저귀는 노인용이 더 잘 팔리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눈살만 찌푸리며 살다 갈 필요는 없다. 시대를 탓하며 살아가는 대신, 남은 생을 더욱 즐겁고 행복을 나누며 살아가자. 삶이 변했다고 해서 사람까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을 잃었다면 우리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대접받지 못했다고 원망하기보다 누군가를 위해 작게라도 나누고 베풀며 살면 된다.
나를 알아주는 세상보다 남을 알아주는 세상을 만들자
세상이 차갑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따뜻한 사람이 되면 된다. 달라진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친한 벗과 한바탕 웃으며 그래도 살아볼 만한 세상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말하며 살다 가면 어떠한가. 사람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사람의 마음까지 저물어야 하는 법은 없다. 결국 세상을 다시 사람냄새나는 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국가도, 제도도 아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서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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