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가을날, 더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모여 힘찬 화이팅 외치는 필자(맨우측),


– 권리만 있고 의무는 사라진 한국 사회가 품은 신분과 현대적 품격에 대한 성찰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양반의 후손”이라 부른다. 족보에는 왕족의 이름이 기세 좋게 등장하고, 성씨는 전국 팔도 어디에서나 명문가를 자처한다. 하지만 한 세기 전만 해도 조선 후기 인구의 상당 비율이 노비였다는 사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많은 노비들의 후손은 왜 오늘날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다. 오늘의 사회가 품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분의 기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날카로운 물음이다.

신분이 사라진 거대한 변곡점으로 한국의 신분 구조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뒤흔들렸다.

첫 번째는 노비제도의 폐지다. 노비는 한 개인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었고, 사고 팔리며 유산으로 남겨지던 존재였다. 그러나 제도가 폐지되자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평민’이 되었다. 신분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았다. 그러나 후손들은 결코 자신을 노비의 혈통이라 말하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신분만이 아니라 ‘낙인’이었다.

두 번째는 교육중시와 교육 팽창이다. 이 변화는 사회 이동성을 급격히 확장시켰고,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이들이 제도적으로 “평등한 시민”이 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양반 사회화’했다는 데 있다. 누구도 스스로를 하층민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사회 전체가 기묘한 ‘전 국민 양반 후손’의 허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계 선진국은 ‘계급의 시민화’를 선택하였지만, 우리 한국의 선택은 ‘전원 귀족화’다

유럽의 귀족은 시민계급으로 흡수되며 권력을 잃고 의무를 부여받았다. 신분의 down grade 민주주의를 열었다. 그러나 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노비, 천민, 중인이던 이들이 한순간에 모두 양반이 되었다. 전국민 신분 up grade라는,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사건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의무 없는 귀족, 책임 없는 특권 의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양반 후손’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이 남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고, 권력 앞에서는 굴종하면서도, 약자에게는 강해지고, 도덕적 책임은 회피하면서 특권적 대우만을 기대한다. 이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 기억의 문제,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태도와 문화의 문제다.

베이커리앤 커피 개업식에서 축하해주는 필자(맨좌측)



우리는 과연 정말 ‘양반의 후손’인가

현대 사회를 살펴보면 의문이 든다. 그것은 바로 남의 노력을 가로채고, 권력에 아부하며, 거짓을 일삼고, 약자를 착취하는 행태다. 그 모습은 우리가 스스로 강조하는 "양반 정신"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사회적 반성문이다.

“노비의 후손이 아닌가 의심된다.”

이 문장은 특정 집단을 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신분의 책임감, 시민적 품격, 공적 윤리를 다시 묻는 말이다. ‘노비’라는 단어는 굴종의 상징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자유를 잃은 사람의 모습, 주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역사적 약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모두가 “양반의 후손”을 자처했지만, 정작 그 허세가 오늘의 사회적 갈등과 윤리적 빈틈을 낳은 것은 아닐까.

이제 필요한 것은 신분의 허상이 아니라, 시민의 품격이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단순하다. 양반의 후예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약자를 먼저 배려하고, 권력에 굴종하지 않으며, 사실을 바로 말하고,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선을 우선할 수 있는 태도다. 이는 어느 신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다.

이제는 사라진 신분의 흔적을 넘어 새 품격을 만들 때다

그 많던 노비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후손은 우리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느 시대 어느 신분이었든, 동일한 인간의 존엄을 가진 시민의 후손이다. 역사는 신분을 지웠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품격을 쓰는 일이다. 우리가 쓰는 품격이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결정한다.

박영대 대한워킹투어협회 회장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조중동e뉴스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합니다. 본 칼럼이 열린 논의와 건전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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