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의 노예살이와 체험의 소설화
최서해의 「홍염」(『조선문단』, 1927.1)은 서간도를 배경으로 조선인 소작인과 중국인 지주 사이의 갈등을 그린 신경향파 작품이다. 불합리한 소작제도, 계급의식에 입각한 인물 설정과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 그리고 방화와 살인에 의한 결말 처리 등은 프로문학에서 구사하는 창작방법이다. 문 서방은 경기도에서 소작인 10년에 겨죽만 먹다가 남부여대하고 딸 하나 앞세우고 서간도로 이주한다. 그는 높은 소작료를 내겠다고 계약하고 지주로부터 경작할 땅과 함께 살림집과 농기구까지 받아 농사를 짓는 지팡살이를 했다.
문 서방은 높은 소작료를 감당하지 못해서 빚이 쌓이고 소작이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빚을 받으러 온 중국인 지주는 문 서방을 구타하고, 빚 대신 그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한다. 방안에서 바느질하고 있던 용례가 달려들어 어머니의 팔을 잡은 지주의 손을 물었다. 지주는 문 서방의 아내를 놓아주고 젊은 처녀 용례를 데리고 간다. 문 서방 내외가 허둥지둥 달려들었으나 소용이 없다. 용례가 지주의 집으로 들어간 후 문 서방은 토지를 받고 白河로 이주한다. 지주는 용례를 다시는 문 서방 내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문 서방의 아내는 병이 깊어지자 죽기 전에 딸을 보고 싶다고 한다. 문 서방은 중국인 지주요 사위를 찾아가 애걸하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는다. 아내가 원한을 품고 숨지자 문 서방은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지주를 도끼로 찍어 죽인다.
한국 근대 문학에서 중국 체험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구이면서 반만 항일운동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강희 16년 청나라 정부에서는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1천여 지역을 청나라의 발상지로 삼아 봉금지구로 정하고 이 지역의 조선인 이주를 금지하였다. 1845년 이후 봉금정책이 완화되고, 1860년대 조선반도의 북부 지방에 대재해가 덮치자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조선의 백성들은 남부여대하고 강을 건너 중국 동북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일병탄을 전후해서도 대규모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주자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려는 우국지사들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이었다. 중국에서 조선인들의 삶은 일제의 추적을 받으면서, 중국인들의 압박과 배척을 받았다.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간도 체험의 소설적 형상화는 최서해로부터 시작했다.
1982년부터 현대소설을 강의하면서 일제강점기 작가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동북지역의 농촌을 답사할 계획을 세웠다. 1990년 아주대 연수단을 인솔하고 중국에 갔으나 동북지역을 답사할 기회는 없었다. 2001년 7월 제7회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를 北京大에서 개최하고 처음으로 동북지역인 二道白河에 갔다. 백두산을 등정하고 원시림 산중에 있는 조선족 마을인 奶头山村을 방문했다. 1920년대 초기부터 함경남도 갑산지역의 사람들이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갑산에서 이곳에 이르는 유일한 육지 경로가 백두산을 경유하는 길이었다. 일제강점기 항일유격대의 활동 근거지로 주목을 받았고, 항일 유격 투쟁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
2005년 9월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 지원 사업에「중국조선족문학의 탈식민주의 연구 및 DB 구축」이 선정되었다. 송현호, 최병우, 김형규, 윤의섭, 한명환, 김은영, 정수자, 차희정, 박지혜, 김인섭, 최은수, 조명숙, 최옥화 등으로 아주대 인문과학연구소 기초학문연구팀을 구성하였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延吉에 갔다. 延邊民族出版社, 延邊作家協會, 延邊大學 한국문학연구소 등을 방문하여 자료를 복사하였다. 잠시 시간을 내서 김호웅 교수의 안내로 연길의 농촌, 해란강, 일송정 그리고 용정의 윤동주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몇 차례 延吉을 방문하였으나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2006년 3월 연변대학 교환교수로 가서 김호웅 교수의 소개로 권철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연변대 교수였고 조선족 평론가인 권철 교수의 소장 도서를 구매했다. 권 교수가 소장하지 않은 자료들은 延邊大 조선어문학부 도서실에서 복사하고 延吉의 출판사와 서점에서 구매하였다. 김호웅 교수의 제안으로 윤윤진 교수와 연락하여 2006년에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를 吉林大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제16회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 2006년)
2006년 6월 제16회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를 吉林大에서 「한국문화와 동북 3성 - 조선족 문학 연구」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개회사는 송현호 회장이, 환영사는 윤윤진 吉林大 조선어연구소장이 했다. 소설 분과 좌장은 김현숙(이대), 유인순(강원대), 발표는 김호웅(연변대), 송현호(아주대), 최병우(강릉대), 한명환(순천향대), 김춘련(심양조선족사대), 우상열(연변대), 이정숙(한성대), 이해영(중국해양대), 이춘매(연변대), 최은수(아주대), 신영덕(공사), 박지혜(아주대), 차희정(아주대) 등이, 시가 분과 좌장은 윤정룡(한남대), 윤석달(항공대), 발표는 윤의섭(서울디지털대), 정수자(아주대), 김은영(대림대), 정연수(삼척대), 조명숙(아주대), 주승택(안동대), 서준섭(강원대), 김유중(항공대), 윤해연(길림대), 권성우(숙명여대), 윤윤진(길림대), 전영숙(연세대), 권혁률(길림대) 등이, 역사․문화․어학 분과 좌장은 나승만(목포대), 김동식(한신대), 발표는 박강(부산외대), 권용옥(남서울대), 김철수(연변대), 박순애(호남대), 권혁수(동북사대), 유영하(백석대), 김 일(연변대), 유영록(길림대), 황옥화(길림대), 이미옥(길림대), 최수진(중국해양대), 김동식(한신대), 다니카와 타케시(와세다대), 오카도모유키(동경학예대), 장호종(노보시비르스크대) 등이 하였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진흙탕 길을 걸을 수 없어서 마차를 타고 만보산에 가서 사건의 현장을 답사했다. 일제강점기 민족 자본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간도로 갔다. 일제는 郝永德을 매수하여 만주에 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였다. 지배인 郝永德은 1931년 4월 만보산의 미개간지 200ha를 조선 농민에게 10년의 조차 계약을 하였다. 조선 농민 180여 명은 즉시 伊通河의 수로 공사를 하였고, 중국 농민들은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경관들이 중국 농민들을 강압적으로 해산시키고 수로를 준공하였다. 이에 중국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개수로가 매몰되었고,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였다. 조선의 신문에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여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도발했다. 조선에서 중국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만보산사건은 만주의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투쟁을 와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음모로 일어났다.
장춘에서 기차로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하얼빈역, 백석 거리, 731부대, 러시안 거리를 답사하였다. 현대문학 전공자들은 백석 거리를 답사하면서 백석 시인의 발자취를 찾으려고 했고, 역사학 전공자들은 하얼빈역을 답사하면서 안중근의 민족적 의거를 확인하려고 했다. 731부대에서는 끔찍한 일제의 만행을 확인하였다. 러시안 거리와 소피아성당에서는 하얼빈의 이국적인 풍경을 확인하였다. 하얼빈에서 소형 버스를 타고 하얼빈시 연수현으로 이동하여 연수현 이주 100주년 행사 담당자를 만나 도서를 구매하고 그의 안내로 소형 버스로 加信鎭,에 갔다. 행정구획이 바뀌면서 加信鎭,은 이름이 夾信, 嘉信, 加信으로 변했다고 했다. 평원지역이라서 1940년대부터 이미 벼농사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만주의 벼농사는 조선 이주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22년 3월까지 연수현의 조선인은 423명이었으나 1931년에는 1,936명으로 늘었고, 일본의 이민정책으로 만주국 시기에는 더 많은 조선인이 연수현으로 이주했다. 1940년 연수현의 조선인 인구는 10,585명이었다.
최서해는 1901년에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인 겸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문 공부를 했고, 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 잡지를 읽으면서 문학 공부를 하였고, 서신으로 이광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1918년 간도로 가서 유랑하다가 1920년 시인 조운을 만났다. 본명이 조주현인 조운은 영광 3.1만세운동에 가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자금을 이동휘 군대에 전달한 민족운동가였다. 그는 조운과 의기투합하여 문우와 가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부두 노동자, 음식점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1923년 귀국하여 이광수의 소개로 조선문단사에 취직하였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토혈」, 「고국」, 「십삼원」, 「살려는 사람들」, 「탈출기」, 「기아와 살육」, 「홍염」 등을 발표했다. 1925년 KAPF에 가입했고, 1926년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조선문단사에서 결혼했다. 조운이 고창 선운사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병우 조운」이란 글을 발표하였고, 조운도 최서해를 기다리는 심정을 시조로 남겼다. 중외일보의 학예부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역임하였다. 1932년 7월 9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 118번지에서 유문협착증으로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아내와 아들들은 성진으로 돌아갔다. 아내는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형제애가 깊었던 조운은 「서해야 분례야」를 발표했다. 아들 최택과 최백은 해방 후 영광으로 왔으나 최택은 병사했고 조운이 월북하자 최택도 북으로 갔다. 유족들이 부재하여 서해의 묘는 무연고 묘가 되었다. 2012년 서해최학송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2015년 중랑문화연구소 주관 최학송 83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현재 수림문화재단 후원과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주관으로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최서해가 기존의 작가와 다른 새로운 작품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간도 체험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소재로 1920년대의 조선의 상황,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주 농민들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그 나름대로 해결 방안을 서술했다. 그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간도도 궁핍하고 살기 어려운 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주 농민에게 간도는 구원의 땅이 아니었다. 국내와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간도에도 여전히 지주가 있었고 소작인의 처지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궁핍한 삶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 그들을 짓눌렀다. 소작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지주와 대결하여 자기의 몫을 받아내는 길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궁핍의 체험은 자연스럽게 계급적 모순의 인식으로 넓혀지게 되었고, 그는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로 부상하였다.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