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향과 도시 노동자의 한

현진건의 「고향」은 『조선의 얼굴』(1925)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농촌의 황폐화, 도시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삶 그리고 식민지 여성의 수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식민지 시대 도시 노동자의 전형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땅도 집도 아내가 될 여자도 빼앗기고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을 떠돌아다니는 하층민 노동자다.

이 소설에서는 도시와 농촌이 대립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도시는 근대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산업화의 현장이면서 낯선 공간이다. 일제의 민족자본 해체로 그의 가족은 살기 좋다는 서간도로 이주한다. 뒤늦게 이주한 그들에게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이주지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부모를 잃고, 신의주와 안동현에서 품팔이 노동자로 지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규슈 탄광과 오사카 철공장에서 일했다. 일본에서 돈은 모았지만 타락한 생활을 했다.

도시의 반대편에 고향이 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고향은 후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던 농촌이었다. 가족들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고, 이웃과 우애가 돈독했고, 이웃집 처녀와 결혼 약속도 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그를 고향으로 이끈다. 죽기 전에 보자는 생각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는 고향에 가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와 그녀는 도시에서 타락한 세계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이다. 도시의 삶이 훼손된 것일수록 그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가 마주한 고향은 여전의 고향이 아니다. 백여 호나 되던 고향 마을은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 얼씬을 안’하는 황량한 곳이 되었다. 고향길에서 자신의 향수가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고향에 대한 환상의 붕괴는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를 탄다. 나는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 옥양목 저고리를 입고 중국식 바지를 입은 기묘한 옷차림을 한 그를 본다. 내가 자리를 잡은 칸에는 공교롭게도 세 나라 사람이 모두 모였다. 삼국의 옷을 입은 그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 모두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내게 말을 건네온다. 처음에 불친절하게 대하던 나는 차츰 그에게 호기심과 동정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 가운데서 나는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것만 같아 그에게 술을 권한다. 우리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릴 적에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 유곽으로 가고요-

그 자신의 상처이면서 우리 민족의 상처이기도 한 민족적 비극의 실상이 유감없이 드러난 노래로, 당시 대중들이 부르던 민요다. 그는 조선, 중국 그리고 일본에서 자본주의를 체험했다. 빚에 쪼들려 남부여대하고 고향을 떠났고, 돈을 벌기 위하여 중국과 일본을 전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살기 위해 물건을 팔아치우듯 딸을 유곽에 팔았고, 그녀는 살기 위해 몸을 팔았다. 인의예지를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과 미덕은 허물어졌다.

(현진건의 고택, 1981년)


1981년 1월 석사학위청구논문 제목을 ‘현진건 문학 연구’로 정했다. 대학 시절 대학신문에 연재한 바 있는 채만식, 70년대 농촌문학, 교지에서 문학상을 받은 김유정, 학부 졸업논문에서 다룬 손창섭, 월간문학에 게재한 70년대 한국문학이 아닌 현진건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새로운 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이 컸고, 다음으로는 친일 문인을 배제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군부 독재에 대한 반감은 친일 군인과 문인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하였다. 당시에는 일제 말기의 지식인 탄압과 살생부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감옥살이했던 문인들이 병사하거나 폐결핵을 앓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에게 살생부에 버금가는 생체 실험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진건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서울대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도서관, 고려대 도서관,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169번지 현진건의 생가, 종로구 부암동 325-2번지 현진건의 고택을 방문했다. 고택은 1930년대 지어진 집으로 1937년 현진건이 매입하여 살기 위해 양계를 했던 집이다. 고택은 낡은 집으로 초라해 보였지만 집필 공간이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살았던 동대문구 제기동 137번지 61호에도 가보았다. 고려대 정문 맞은편 뒷골목으로 집 앞에 마구간이 있었다고 했으나 그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82년 「현진건 문학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20년대 소설연구의 현황과 문제점」(『한국학보』, 1983 가을)에서 현진건의 소설론을 고찰하였고, 1988년 박사학위 논문 「한국근대소설론연구」의 ‘본격적 소설론의 성립과 소설론의 심화’라는 장에서 현진건과 염상섭의 소설론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1998년 현진건과 魯迅의 「고향」을 비교하여 『비교문학』(23호, 1998)에 발표했고, 현진건과 老舍의 「운수 좋은 날」과 「駱駝祥子」의 인력거꾼을 비교하여 『비교문학』(25호, 2000)에 발표하였다.

1989년 현진건의 외손자 박동건 교수가 아주대 심리학과에 부임하였다. 그는 박종화의 외아들 박돈수와 현진건의 외동딸 현화수의 1남 5녀의 셋째로 외아들이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석사학위청구논문과 박사학위청구논문을 작성하면서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2000년 초 한국현대소설학회 임원들과 현진건의 고택을 답사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지 않고 낡은 집을 허물어 공터만 남아 있었다. 「고향」의 그와 그녀가 살던 동리를 연상시켰다.

(제7회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 북경대, 2001년)

현진건 소설의 배경인 동북 도시지역의 답사는 2001년에 시작하여 2019년에 마무리하였다. 2001년 7월 北京大에서 개최된 제7회 한중인문학회 국제학술대회가 끝나고 안도현의 二道白河를 답사하였다. 2005년 8월 瀋陽의 遼寧大에서 개최된 한국전통문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고 박옥걸 조성을 이원희 윤승구 이병근 오용직 오상탁 선생과 아주대 연수단을 인솔하고 遼寧省 박물관, 북릉공원, 서탑가, 압록강, 東牟山城,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집안박물관, 5회분 4호묘, 국내성, 하고성지, 상고성지, 미창구장군묘 등을 답사하였다. 2011년 7월 농어촌희망재단의 문화유적답사단을 인솔하여 하얼빈, 단동, 압록강, 단교, 심양, 북경을 답사하였다. 2019년 10월 遙寧大 장동명 교수의 초청을 받아 심양에 갔다가 서탑가, 張學良 기념관, 9.18 기념관을 답사하였다,

(압록강, 2005년)

丹東은 옛 이름이 安東이다. 고구려 영토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당의 안동도호부에 소속되었다가 발해의 땅이 되었다. 청이 중원을 장악하고 봉금지대를 설정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봉금령이 해제된 이후 1876년 安東縣이 설치되었다. 1931년 滿洲事變으로 일본군이 점령하여 일본의 대륙진출기지가 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 의해 安東省 安東縣이 되었고, 1965년 丹東市로 개칭하였다.

西塔街는 심양 시내에 있다. 조선의 사신들이 자주 들렀던 곳이고,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이주지였다. 현재는 조선족, 한국 교민, 북한인들이 밀집해서 사는 한인촌이 되었다. 백두산과 집안시 그리고 심양까지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현장이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60만 명의 조선인은 심양에서 노예로 살았다. 1909년에 체결한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조약을 빌미로 중국이 암묵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를 생각하였다.

(제6회 한국전통문화국제학술대회, 요녕대, 2005년)

(요녕대 강연, 2019년)


현진건 소설의 배경인 일본 오사카와 규슈 답사는 1990년부터 시작했고, 2005년과 200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990년 2월 박돈서 교수와 아주대 연수단을 인솔하고 오사카, 교토, 나라 등지를 답사하였다. 2005년과 2006년에는 한국연구재단의 인문사회 기초연구과제인 「재일동포문학자료 수집, 정리 및 민족주의적 성격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한승옥 소재영 교수와 도쿄,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 규슈를 답사했다. 특히 오사카와 규슈에서 재일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났다.

(교토, 1990년)

현진건은 1900년 음력 8월 9일 대구에서 당시 대한제국 우체국장이던 현경운과 이정효 사이에서 4형제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소년기에는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갑부 이길우의 딸 이순득과 결혼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17년 동경 成城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18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정건을 찾아갔다가 1919년 귀국하여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 등과 동인지 『거화』를 만들었다.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고 같은 해에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1922년 동인지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조선일보사 재직 중에 신문사 내부의 타락상에 염증을 느끼고 1923년 『동명』으로 옮겼다. 『동명』은 후에 시대일보로 바뀌었다. 1925년 시대일보가 망하자 동아일보로 옮겼다. 송진우와 김성수의 인정을 받아 192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승진했다.

현진건은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간접적인 투쟁방식으로 문학 활동과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말살사건 당시 사회부장이었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은 사직했고, 이길용 현진건 신낙균 서영호 최승만 등은 언론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동아일보는 8월 29일 자로 무기한 정간되고 자매지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현진건은 1년간 감옥생활을 했고, 출옥하여 사회부장직을 사임하고 언론계를 떠났다. 일제의 감시로 다시는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부암동에서 한때 닭을 천 마리 정도 기르기도 했으나 어느 해 닭이 모두 죽었다. 그는 백수로 지내면서 손님이 오면 닭을 잡아 접대했다.

미나미 지로 총독은 1938년 조선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말살 정책을 강행했다. 현진건은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흑치상지가 사상이 불온하다고 연재 52회로 중단되면서 붓도 꺾었다. 당시 작가들은 생존을 위해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창씨개명을 하고, 문인보국회에 가입했으나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문인보국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끼니를 잇기 어려워 신설동으로 이사했다가 제기동 판잣집으로 이사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박종화의 외아들과 현진건의 외동딸은 육당 최남선의 주례로 결혼했다.

현진건은 1943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의 산자락(현재 서초동)에 묻혔고 아내 이순득은 대구시 수성동의 친정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혼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았던 현진건과 그 부인의 쓸쓸한 최후였다. 32년 전 발표한 「빈처」(『개벽』, 1921)에 등장하는 작가 지망생 부부의 말년을 보는 듯했다.

(대구시 중구 관덕정길 28 현진건 현창비)
현진건

(현진건의 생가)

필자 아주대 명예교수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현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