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역사는 왜 늘 미쳐 있었는가?
인류의 역사는 아이러니하고 놀랍다. 전문가도 있었고, 학자도 있었고, 심지어 철학자도 넘쳐났는데 결과는 늘 암흑이다. 누군가 미쳐 날뛰면, 나머지는 환호했다. 왕이 ‘나의 말은 신의 뜻이다’라고 하면 백성은 감히 신의 목소리를 거역할 수 없었고, 독재자가 ‘국가를 위해 나 하나 희생한다’라고 하면 국민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그리하여 극단의 이기주의자인 한 사람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땀으로 피라미드가 세워지고, 만리장성이 쌓이고, 전쟁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됐다.
Ⅱ. 똑똑한 사람들의 집단적 바보짓
놀라운 건, 그 시대마다 ‘전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며 길일을 계산했고, 철학자는 군주의 덕을 찬양했으며, 언론인은 왕의 말 한마디를 신탁처럼 받아썼다. 그야말로 ‘지성의 공범’들이다. 그들은 이건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이건 깊은 뜻이 있다고 해석했다. 결국 인류는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 쓰고, 따라가는 인간(Homo followers)이라 읽는 종이 되어버렸다.
Ⅲ. 누구를 불러야 하는가?
이 미친 인간 군상들을 구원하려면, 도대체 누구를 불러야 할까? 플라톤을 불러볼까? 그는 ‘철인(哲人)이 통치해야 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정치의 달인이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었으니, 철인이 권력자 곁에 서면 ‘지혜’보다 ‘야망’이 앞선다는 걸 증명했다.
공자를 불러볼까?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며 질서를 외쳤지만, 그 질서가 수천 년간 왕조의 틀을 굳히는 데 이용됐다. 니체를 부를까?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럼 내가 신이다! 라고 하며 더 미쳤다. 마르크스를 불러볼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했더니, 단결한 건 권력자를 향했고, 노동자는 여전히 단결 회비만 냈다.
Ⅳ. 그래도 혹시, 칸트를
그래도 굳이 한 명을 꼽자면 칸트를 불러야 한다. 그는 이성은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망상으로 빠진다고 했다. 그 말, 18세기에도 절실했지만 21세기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망상형 민주주의’ 모두가 옳다고 외치는 시대, 칸트라면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네 머리로 생각하라(Sapere Aude)!’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는 또 이렇게 외친다. ‘내 머리로 생각하라니, 내 머리는 이미 사이비 유튜브에 맡겼다!’
Ⅴ. 철학의 부재, 풍자의 시대
지금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빠졌지만, 정작 ‘사유의 샘’은 말라가고 있다. 정의는 댓글 수로 측정되고, 진실은 알고리즘이 정한다. ‘좋아요’가 많으면 진리이고, ‘싫어요’가 많으면 반역이다. 이쯤 되면 소크라테스도 포기했을 것이다.
독배를 마시며 ‘아테네 시민이여, 너희는 여전히 무지하구나’라고 했던 그가 지금 유튜브를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그땐 그래도 나를 직접 욕했지… 지금은 조회수로 나를 죽이는구나!’
Ⅵ. 대중의 구원은 철학이 아니라 깨달음
결국 인간을 구원할 건 철학자 한 명이 아니라, 각자의 작은 깨달음이다. 왜 저 사람의 분노에 내가 끌려가야 하지? 왜 저 말이 맞는지 아닌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퍼다 나르지? 이 한마디의 자각이, 만리장성보다 단단한 ‘이성의 성벽’을 세운다.
Ⅶ. 이제 당신이 철학자
우리가 철학자를 찾는 이유는, 사실 스스로 생각하기가 귀찮아서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했다. 철학자가 세상을 구한 적은 없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대중이 세상을 바꿨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 외치자. 칸트도, 공자도, 마르크스도 잠시 쉬시라! 이젠 내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정의로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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