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 속 욕망과 폭력의 역사를 파헤치다…연극 '라이오스'
오이디푸스-라이오스 부자의 비극 조명…전혜진 '1인 18역' 연기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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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라이오스' 공연사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이 연극은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에게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왜 오이디푸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대체 라이오스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요?"

좁은 길에서 서로를 맞닥뜨린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혈기 넘치는 청년 오이디푸스가 길을 비키라며 서로에게 사납게 소리를 지른다.

'아들을 낳는다면 아들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예언을 피하려 오이디푸스를 내다 버린 라이오스는 자신의 앞에 선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오이디푸스도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다.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는 두 사람 사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순간, 연극 속의 시간은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를 잉태하던 때로 되돌아간다.

지난 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 연극 '라이오스'는 마치 범죄 사건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처럼 그리스 신화의 인물을 조명한다. 아버지가 갓난아이를 버리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관객들은 인물에 이입하는 대신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듯 사건의 전말을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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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스' 배우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라이오스'는 독일 출신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가 그리스 테베 왕가의 비극을 탐구한 '안트로폴리스 5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2023년 초연되어 국내에는 첫선을 보이는 작품으로, 극단 신세계의 김수정 상임연출가가 연출을 맡았다.

작품은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창작한 라이오스의 성장 과정과 행적을 1인극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배우 전혜진이 작중 해설자 역할을 맡는 동시에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 오이디푸스 등 18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전혜진은 테베 왕가에 대물림되는 폭력의 역사를 설명하는 해설자, 라이오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왕비 이오카스테 등으로 분해 인물을 둘러싼 환경을 묘사한다. 또한 라이오스도 오이디푸스처럼 어릴 적 숲에 버려지는 등 왕가의 권력다툼에 휘말린 피해자였다는 점을 설명하며 입체성을 더한다.

라이오스 부부가 끔찍한 예언을 들은 뒤에도 오이디푸스를 잉태하는 과정에서는 4가지 시나리오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라이오스는 시나리오 속에서 이오카스테의 의지에 반하는 관계를 맺거나, 예언을 내린 노파에게 보복을 가하는 등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작품은 라이오스에게 일어난 비극이 권력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욕망과 그의 폭력성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인스타그램, 패스트푸드점, 오토바이 등 현대적 요소를 더해 테베의 비극이 동떨어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선언을 풍자하며 권력자의 비이성적 판단과 폭력을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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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스' 공연사진 [국립극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작품이 여러 관점과 시간을 쉴 새 없이 전환하는 가운데서도 직관적인 연출과 전혜진의 탁월한 표현력은 관객을 몰입시켰다.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좁은 길에서 서로를 마주치는 장면에서는 스크린을 활용해 상황을 직관적으로 제시했다. 전혜진이 관객을 등지고 선 가운데 배우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촬영한 영상을 무대 뒤편 스크린에 띄워 두 인물이 서로를 마주한 듯한 효과를 연출했다.

전혜진은 테베의 노인을 연기하며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로 웃음을 끌어내는가 하면, 오이디푸스를 내다 버리는 라이오스 부부를 연기하는 순간에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묻어나는 표정 연기로 인상을 남겼다.

'라이오스'는 오는 22일까지 공연된다. 국립극단은 내년 중 '안트로폴리스' 3∼5부를 선보인다.

cj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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