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돋보기] 내가 한 말, AI는 기억하고 있다
사용자가 모르는 사이 쌓이는 기록들…기억형 AI 확산

데이터는 누구의 것인가…삭제권·머신 언러닝 논쟁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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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F1 더 무비였어요. 브래드 피트가 출연했죠. 볼만하셨나요?"

직장인 A씨가 퇴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속 인공지능(AI) 비서에게 "지난번에 추천받았던 영화 제목이 뭐였지?"라고 묻자 AI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 친근한 대화 뒤에는 기존에 사용자가 했던 말, 입력한 기록, 묻지 않은 취향까지 '기억 장치'처럼 모두 쌓이고 있었다.

AI는 이제 매번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사용자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챗GPT뿐만 아니라 네이버, 카카오톡의 AI까지 자신의 대화 한 줄, 취향, 고민이 실시간으로 저장되고 연결되는 '기억하는 AI'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편리함의 대가는 바로 '내가 한 말은 누구의 기억이 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 '기억하는 AI'의 시대…챗GPT가 불러온 '메모리' 기능

AI가 인간의 대화를 기억하는 시대는 오픈AI가 올해 초 챗GPT에 대화를 기억하는 '메모리' 기능을 순차 적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 기능의 목적은 사용자의 취향이나 프로젝트 정보를 기억해 다음 대화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나는 싱거운 음식 좋아해"라고 입력하면 다음에 요리 추천받을 때 "짜거나 맵지 않은 스타일"을 먼저 제안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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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인공지능 활용 어디까지(CG) [연합뉴스TV 제공]

물론 사용자에게 '통제권'이 있다.

사용자는 설정에서 메모리 기능을 아예 끄거나 '임시 채팅'을 통해 대화 내용 저장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대화 중에 "이건 잊어줘"와 같은 구체적인 지시로 삭제도 가능하다. 챗GPT는 저장된 메모리 외에 최근 대화 전체를 참고해 맞춤화하지만 이 기능들 전부 사용자가 직접 관리, 삭제, 비활성화할 수 있고 언제든 자신의 데이터를 열람, 수정, 삭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데이터 관리 메뉴에서는 세부 항목별로 정보 제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용자가 모르는 사이 누적되는 대화의 '비식별 분석 결과'가 시스템 학습에 쓰일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 국내 AI 비서도 기억 기능 탑재…'네이버·카카오'는

우리나라에서도 AI 비서가 인간의 대화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다만 데이터를 처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은 서비스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

네이버 클로바 X는 대화 내역을 '비식별화'한 후 연구, 서비스 개선, 신서비스 개발 목적으로 최대 5년간 보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다만, 이용자 동의 시에만 1년간 대화 목록이 유지되며 이용자는 언제든 삭제를 요청할 수 있고 즉시 파기가 가능하다. AI 학습 데이터는 엄격하게 분리해 활용된다는 것이 네이버 측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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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K-거대언어모델 '하이퍼클로바X' 공개 (서울=연합뉴스) 국내 최대 포털인 네이버가 24일 향후 플래그십이자 신수종 사업으로서 자사의 명운을 건 한국형 거대언어모델(LLM) 인공지능(AI) '하이퍼클로바X'를 공개했다.

하이퍼클로바X는 네이버가 2021년 공개한 '하이퍼클로바'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한국어에 최적화한 LLM이다. 사진은 하이퍼클로바X 서비스. 2023.8.24 [네이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

카카오[035720] AI 메이트 '나나' 역시 사용자의 대화 맥락에 기반해 스케줄, 요약, 제안 등 개인화 서비스를 제공하며, 개인정보 처리 방침에 따라 데이터가 저장되고 활용된다. 현재 베타 서비스 단계지만 대화 기억을 전제로 한 설계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말 그대로 이용자는 이제 AI에 '기억될 사람'이 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해야 하는 시대에 놓인 것이다.

◇ 정부 최초 AI 개인정보 가이드 등장

AI가 방대한 개인정보를 기억하고 활용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 8월 개인정보보호위원회(PIPC)는 '생성형 AI 개발·활용을 위한 개인정보 처리 안내서'를 내놨다.

이 가이드라인은 AI 개발 및 활용 전 과정에 개인정보 보호법이 적용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며 AI의 데이터 학습, 운영 단계별 법적 근거, 동의, 민감정보 보호, 프라이버시 중심 설계 등을 상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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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생성형 AI의 시대'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17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월드 IT쇼에서 관람객들이 LG전자 부스에 전시된 LG 그램 생성형 이미지 AI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2024.4.17

ksm7976@yna.co.kr

특히, 이용자가 데이터 삭제권을 행사할 경우 AI 모델 자체에서 학습 데이터를 제거하는 '머신 언러닝'까지 요구하는 내용에 들어있다.

실제 서비스 제공자는 데이터 보관 및 활용 목적을 명시하고 투명하게 통제 기능을 제공해야 하며, 이용자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설계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AI 비서를 만드는 쪽은 단순히 편리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데이터를 처리하고 기억을 설계하는 기술도 감수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 AI는 기억하지만 우리는 통제할 수 있는가

AI는 더는 단순히 '대답하는 기계'가 아니다.

이제 AI는 '듣고, 저장하고, 다시 말하는 존재'로 진화했다.

문제는 그 기억이 내가 기능을 껐다고 완전히 사라지는지, 삭제를 요청했을 때 AI 모델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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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업무 활용 (PG) [강민지 제작] 일러스트

인간은 망각을 통해 정신적으로 보호받지만 AI는 기억을 통해 발전한다. 이 때문에 '기억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 새로운 윤리적, 기술적 논쟁이 생겨나고 있다.

당신의 다음 선택은 무엇인가. AI에 기억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기억되지 않길 원하는가.

AI의 편리함이 커질수록 그 편리함 뒤에 놓인 기억 장치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디지털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president21@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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