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시간의 화염, 그리고 시작된 의문
2025년 9월 26일(월) 오후 8시 20분경,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가정보원 산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자그마치 22시간 만에야 진화되었다는 보도가 청천벽력으로 전해졌다. 국가 행정의 심장이라 불리는 전산망이 불타며, 대한민국의 디지털 정부는 순식간에 ‘먹통’이 되었다. 주민등록, 민원, 세금, 행정서비스가 동시에 멈췄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건 그 이후였다. 복구 작업을 지휘하던 한 공무원이 극심한 압박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보였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나라는 슬픔과 의문 속에 잠겼다. 단장의 고통에 잠긴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 ‘업무 스트레스’라는 만능 변명
언론은 서둘러 원인을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몰았다. 정부는 침묵했고, 보도자료 한 줄이 전부였다. 그러나 국민은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공직자가 야근과 과로 속에서도 버티고 있다.
그런데 왜 그 공무원은 죽음으로 항의했을까? 단순한 탈진이 아니라 ‘무언의 강요’, ‘의도된 침묵’이 있었던 건 아닐까? 소방대원도, 군인도 아닌 행정 공무원이 생을 끊을 만큼의 압박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폭력이다.
■ 화재보다 무서운 건 무능이다.
한 나라의 핵심 전산망이 불 한 번에 마비된다니, 이게 IT 강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인가? 사후 대응도 혼란의 연속이다. 대통령실은 “큰 문제 아니다”, “곧 복구된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국민은 그 ‘곧’이 열흘이 지나도록 20%도 복구가 안 되었다. 공공기관, 병원, 민원창구가 멈춰도, 청와대의 위기관리센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그 모든 부담은 실무 공무원 한 명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위에서는 “국가적 사고”라 하고, 아래에서는 “개인적 과실”이라 한다. 책임은 위로 가지 않고, 희생은 아래로 떨어졌다.
■ 진상은 흐려지고, 책임은 증발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붕괴’다. 그런데 대통령실과 당정은 사건 초기부터 불투명한 브리핑과 모호한 발표로 일관했다. “은폐”라는 단어가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국민은 묻는다. 초동 대응은 왜 늦었는가? 복구는 왜 그렇게 지체되는가? 공무원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운 것은 아닌가? 거짓과 무능이 섞이면, 그것은 이미 범죄다. 국정감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별도 국정조사가 필요하고, 상황에 따라 특검도 검토해야 한다. 진실을 피하는 순간, 국가는 공범이 된다.
■ 냉장고는 부탁했지만, 양심은 부탁하지 않았다.
한편, 이 비극의 와중에 대통령 부부가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가 전산망은 타버렸는데, 대통령은 냉장고를 열고 있었다. 한 공무원은 목숨을 던졌는데, 대통령 부부는 웃고 있었다.
국민의 눈에는 그 장면이 “국가의 부패한 냉장고”처럼 보였다. 냉장고는 깨끗했을지 몰라도, 권력의 양심은 이미 썩어 있었다. 냉소와 무책임이 섞인 지도자의 미소는 국민의 눈물보다 가볍다.
■ 반복되는 국가의 트라우마
세월호, 이태원, 오송, 그리고 이젠 전산망 사태까지. 사건마다 “재발 방지하겠다.”, “진상규명 하겠다”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다음 비극은 늘 예고 없이 온다. 공무원은 죽고, 정치인은 웃고, 진실은 묻히고, 국민은 잊지 못한다. 이제 국민은 비극의 피해자이자 목격자가 되어버렸다. 시스템은 고장 났고, 책임은 늘 사라진다.
■ 진실을 밝혀야 국가가 산다.
지금 필요한 건 애도만이 아니다. 진실이다. 그리고 책임이다. 누가 화재를 막지 못했고, 누가 공무원을 의문의 죽음으로 몰았는지 밝혀야 한다. 그 답을 외면하는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바랄 자격이 없다.
냉장고를 부탁하기 전에, 양심을 부탁하라. 이 참담한 비극을 끝내는 길은 단 하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아직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표다.
고무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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