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자신의 정육과 같이 생각하며, 이 땅의 아버지 또한 그에 버금가기에 훌륭함에 고개 숙여지면서 더러는 눈물을 머금게 한다. 요즘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는 모습에서 분노를 자아낸다. 자식을 한낱 소유물인 것처럼 간주하는 이러한 사고가 마땅치 못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휴머니즘을 망각한 행동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나라만의 그릇된 자식관도 문제를 더한다.

필자를 이쯤에서 3,200년 전, 현재 튀르키예의 차나칼레 주 소재 트로이전쟁터(트로이유적지 박물관)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다. 이곳은 서양 문학의 효시이자,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펼쳐지는 장소이겠다. 몇 번이나 읽어야만 이해가 가는 책이겠다. 따라서 우둔한 필자는 대여섯 번을 읽고, 이에 관한 '영화 트로이’를 한글 자막 없이 유투브에서 세 번이나 관람하는 기염을 토했다.

트로이언덕에 핀 양귀비에 취하다


시인을 넘어, 인류 최초의 철학자이자 모든 학문의 아버지로 자리매김해도 손색이 없다는 평소 시의 생각이다. 21세기를 걷는 우리가 고차원적 학문이나 문학, 그리고 철학 등을 논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필자가 추구한 학문의 종착역(?)에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프리아모스'의 부성애에 짠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일리아스>에서 보면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에게 절친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데다, 끝내는 자신마저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고 쓰러졌다. 그의 어머니는 배를 타고 트로이 해변 전쟁터까지 요즘 말로 표현하면, 전상을 입고 드러누운 국군수도통합병원에 부랴부랴 아들에게 면회를 왔겠다. 병사들 틈에서 "들어보시오. 나는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용사인 아들을 낳아 전쟁터로 보냈소."라며 통곡한다. "아들아, 어째서 우냐, 그리스군 전세가 아들 그대가 없어 비참한 꼴이 되는구나!"고 덧붙인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목숨을 앗아간 헥토로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더아나가 빼앗긴 갑주 제구까지 되찾겠다고 굳은 힘을 얻는다.

그 다음은 헥토르와의 재결투에서 아킬레우스는 끝내 목숨을 빼앗고, 사체가 된 헥토르를 마차에 이끌고는 군막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트로이의 왕이자 늙은 아버지인 프리아모스는 큰아들인 헥트로의 사체를 내달라고 아킬레우스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친구를 뺏아간 적장의 아버지, 아들의 목숨을 빼앗긴 아가멤논 다음의 적장인 아킬레우스 간의 긴장과 묘한 눈물은 진한 인간애를 자아낸다. 이로써 그 당시 풍습대로 12일장을 치루고 잠시 양측은 휴전하기에 이른다.

3,200년 전과 지금의 인류애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모성애와 부성애는 인류가 낳은, 아니 신이 낳은 최고의 선물이자 사랑이 아닐까 싶은 아침이다. '어머니', '아버지'란 이름 앞에 또다시 고개를 떨군다. <일리아스>에서는 꽃인 '양귀비'가 나온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역사적인 이 전쟁터에 매료돼 같은 해 봄과 가을에 걸쳐 두 번이나 답사하는 호사를 누렸다. 책 속에서 진짜 양귀비는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양귀비란 명칭이 더 늦은 셈이다. 필자가 직접 트로이 언덕에 핀 양귀비(사진. 필자 촬영)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을엔 그 언덕 위 낙엽이 질듯한 올리브나무 아래에는 간이의자가 있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전쟁 시기에는 바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평야 지대이나,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본고를 2021.1.12.에 블로그에 게재한 것을 오탈자를 바로 잡아 기고하는 필자는 문학평론가이자 인문•법학자, 연구인, 저술가로서 학술서인 <부동산정의론>과 정치평론집인 <국회의 특권이 사라져야 대한민국이 산다>란 대표 저서 외 다수가 있다. jja-news@nate.com

(정종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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