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더 빨라진다. Shorts에서는 사람의 생각이 3초 단위로 잘려 나가고, 감정은 ‘좋아요’ ‘슬퍼요’ ‘화나요’ 한 번으로 요약 표현된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빨라도 인간의 본질은 제자리를 맴돈다. 진짜는 속도에 있지 않고 멈춤 속에 있다. 속도의 시대에 필요한 철학적 멈춤, 정작 고요 속에서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Ⅰ. 세상만 도는 중, 인간은 돌아본 적이 없다.
세상은 오늘도 미친 듯 돌아간다. 손끝의 스크롤이 세상을 돌리고, 영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잘려 나간다. 사람의 생각까지 편집되고, 감정은 자막처럼 자동으로 흘러간다.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더 자주 보였는가가 인생에 미친 성적표가 되었다.

그러나 빠름의 끝에는 언제나 공허가 있다. 세상은 속도를 자랑하고 인간의 영혼은 늘 숨이 찬다. 속도는 세상을 태우고, 고요는 인간을 살린다.

Ⅱ. 너무 빨라서 사라진 것들
선풍기 날개는 돌수록 투명해진다. 분명히 있는데,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는다. 세상도 그렇다. 존재는 있으되 인식은 사라지고, 사람은 살아 있으되 마음은 비어 간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보이지 않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은 보지 못함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두려운 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멈춤은 도피가 아니라 복원이다. 고요한 물에서만 하늘이 비치듯, 정지한 마음에서만 진실이 드러난다.

Ⅲ. 숫자의 노예, 마음의 실직자
요즘 세상은 숫자놀음에 취했다. 좋아요 수, 조회 수, 팔로워 수, 이제 사람의 존재가 모두 통계로 평가된다. 숫자는 빠르지만, 마음은 느리다. 빠름은 효율을 낳지만, 느림은 진실과 의미를 낳는다.

그러나 세상은 의미보다 효율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숫자에 잡아먹히고, 마음은 실직자가 되었다. 조회 수는 늘어나도 자존감은 줄어드는 시대, 빠른 길에는 방향이 없고, 멈춘 길에만 선택과 지향점이 있다.

Ⅳ.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품격이다.
모두가 달릴 때 멈춘다는 건 어쩌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은 멈춘 자를 낙오자로 보지만, 진짜 낙오는 자기 안을 못 보는 사람이다. 멈춤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사유의 기술이다. 선풍기가 멈춰야 바람이 있었다는 것이 보이듯, 마음이 멈춰야 인생의 윤곽이 드러난다. 멈춤은 후퇴가 아니라 통찰이다.

Ⅴ. 느림의 언어로 진리를 읽다.
세상의 알고리즘은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지만,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믿고 싶은 마음 그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심 언어다. 느림은 결함이 아니라 통찰의 속도다. 강물은 천천히 흘러야 깊어진다. 진리는 늘 느림의 옷을 입고 걸어온다.

Ⅵ.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한다.” 이 말은 철학이 아니라 삶의 물리학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결국 마음의 그림자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세상이 요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요란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요하면 세상도 고요하다.

세상을 바꾸려면 세상을 고치는 게 아니라, 나를 멈춰 세우는 일부터 해야 한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고요는 공백이 아니라 깊이다. 멈춰야 결국 보인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인식한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멈춤이 곧 사람의 품격을 높인다. 고요는 약함이 아니라 힘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진리는 여전히 느리다. 반드시 멈춰야만 보이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것이, 결국 우리를 지배한다.

[고무열 박사의 인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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