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조중동e뉴스) 1658년 혹한의 어느 겨울날, 효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우암 송시열에게 담비 털로 만든 저고리, '초구(貂?)'를 하사한다. 송시열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은혜"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효종은 "호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따뜻하게 하려는 뜻"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왕의 깊은 뜻에 감복한 우암은 옷 안쪽에 이 사실을 친필로 기록하여 그 온기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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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털배자 [경운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처럼 단순한 방한의 기능을 넘어, 입는 이의 품격과 나누는 이의 정성까지 담았던 우리 전통 겨울옷 '갖옷'의 세계를 조명하는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경기여고 내 경운박물관과 국립대구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한 '갖옷, 겨울을 건너다' 특별전은 선조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냈던 지혜와 미학을 한자리에서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갖두루마기, 갖저고리 등 주요 복식 유물부터 털배자, 난모(방한모) 등 다채로운 방한용품 100여 점을 통해 갖옷에 담긴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깊이 있게 탐색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온기를 품다, 갖옷의 철학

갖옷은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총칭하는 말이다. 서양의 모피 코트가 동물의 털을 겉으로 드러내 부와 권위를 과시했다면, 우리의 갖옷은 정반대의 미학을 추구했다. 겉감은 비단이나 무명 같은 직물을 사용해 단아하고 검소하게 만들고, 옷의 안쪽에 털을 넣어 보온성을 극대화했다.

경운박물관 관계자는 "동물의 털을 겉으로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고, 오직 따뜻함만을 취했던 옛사람들의 옷 짓기를 돌아보는 전시"라며 "이는 실용성을 중시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던 선비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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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구 재현품 [경운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송시열 초구 재현품]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효종이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의 재현품이다. 겉모습은 평범한 저고리 같지만, 그 안쪽은 최고급 담비 털로 채워져 있다. 군신(君臣) 간의 따뜻한 정이 담긴 이 옷은 갖옷이 지닌 '내면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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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난모 [경운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겨울 채비의 모든 것

다채로운 형태와 소재로 만나는 겨울옷

전시는 다양한 종류의 갖옷을 통해 선조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털배자] 저고리 위에 덧입어 멋과 보온성을 더했던 '털배자'는 다채로운 색상과 형태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토끼털, 여우털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소매가 없는 조끼 형태라 활동성을 높이면서도 몸의 중심을 따뜻하게 유지해주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갖저고리와 갖두루마기 유물들은 당시의 뛰어난 제작 기술을 엿보게 한다. 특히 여러 모피 조각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갖저고리는 귀한 재료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 했던 장인들의 지혜와 정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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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두루마기 [경운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갖두루마기] 여성용 갖두루마기는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안쪽에는 한국의 청설모로 잘 알려진 청서피(靑鼠皮)를 촘촘히 대어 뛰어난 보온성을 자랑한다. 삵(살쾡이) 가죽이나 양털로 안을 댄 갖마고자와 함께, 겉보기에는 일반 옷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혹한을 이겨내기 위한 최상의 방한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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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전시품 [경운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옷뿐만 아니라 머리와 목을 감싸는 방한용품이 필수적이었다.

[사진 설명: 다양한 난모]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의 다양한 방한모인 '난모(煖帽)'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날의 후드처럼 머리에서 어깨까지 덮어쓰는 '휘항', 이마와 귀, 목덜미까지 완벽하게 감싸주는 '남바위', 그리고 주로 부녀자들이 장식용으로 즐겨 썼던 '아얌' 등은 각각의 형태와 용도를 비교하며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이들 난모는 단순한 방한 기능을 넘어, 착용자의 신분과 개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패션 아이템이기도 했다.

전시는 과거의 유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1900년대에 제작된 서양식 망토부터 근현대 남성의 중절모, 여성의 핸드백과 코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온 겨울 패션의 양상을 함께 보여주며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이번 전시는 서울 강남구 경기여고 100주년기념관 내 경운박물관에서 오는 12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첨단 소재가 없던 시절, 자연에서 얻은 재료에 지혜와 정성을 더해 혹독한 추위를 이겨냈던 선조들의 온기를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