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열 박사의 칼럼]
명절은 본디 기쁨과 감사의 날이었다. 설날에는 새해의 복을 빌며 덕담을 나누고, 추석에는 한 해 수확의 풍요를 조상과 나누었다. 명절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세대를 잇고 공동체를 잇는 가장 따뜻한 시간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명절은 그 본뜻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이들에게 명절은 더 이상 기다려지는 날이 아니다. 기쁨보다 한숨이 먼 저이고, 감사보다 피곤이 앞선다. 가장 큰 이유는 과중한 차례 준비와 집안 어른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다. 수십 가지 음식을 마련하는 일은 대부분 여성의 몫으로 돌아가고, 장을 보고 밤새 음식을 준비한 뒤에도 제사상 앞에는 앉지 못한다.
명절이 가족의 시간이라면 왜 가 족의 절반은 부엌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또한, 차례상의 과잉도 문제다. 본래 고려·조선 시대의 차례는 간소함과 정성을 중시했으며, 조상께 올리는 것은 산해진미가 아니라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경쟁적으로 차례상을 차리며 형식이 절대시 되었고, “이건 왜 없느냐”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감사의 자리가 서로를 탓하는 자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상을 기리는 의례가 오히려 산 자들의 마음을 갈라놓는 아이러니,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명절 그 자체가 아니라, 본뜻을 잊고 형식과 의례만 좇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명절은 결국 마음의 의례다. 조상을 향한 감사, 가족을 향한 따뜻한 마음, 그리고 살아 있음에 대한 축복, 그 본질을 외면한 채 음식의 가짓수와 여성의 노동으로 정성을 가늠하려 했기에, 명절은 축제가 아니라 의무가 되었고, 화합의 자리가 아니라 갈등의 무대가 되었다.
이제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은 확 걷어내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차례는 간소하게, 그러나 마음은 깊게, 밥과 국, 과일과 술만으로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정성이지 형식이 아니다. 음식 준비는 온 가족이 함께 나눠야 한다. 남성과 아이들도 함께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뒷정리를 도우며, 모두가 한 상에서 웃으며 식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조상께 드리는 진짜 효도이자 아이들에게 남길 가장 값진 전통이다. 또한, 명절은 억지 만남이 아니라 화해와 위로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보다 “수고 많았다”라는 따뜻한 말이 더 절실하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 있음 자체를 축복하는 것, 그것이 명절의 참된 의미다. 조상도 후손이 모여 오순도순 행복한 시간을 가지길 바랄 것이다. 명절은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 차례의 형식을 줄이고 마음의 깊이를 더하며, 가족의 짐을 나누고 서로의 삶을 존중할 때, 명절은 다시 축복의 날이 될 수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전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되살리는 것이다.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현재를 성찰하며, 미래를 다짐하는 자리. 그것이 명절의 본모습이다. 명절이 다가올 때 한숨이 아니라 설렘이 먼저여야 한다.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희망의 기억 으로 남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뜻을 되살리는 용기다. 명절은 고통의 시간 이 아니라, 감사와 화해, 그리고 희망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고무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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