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반대' 게이머 집단행동 후 3년…게임위가 달라졌다
사후관리·소비자 보호 위주로 개편…소통 행보도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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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게임물관리위원회 사무실 [촬영 김주환]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게임물관리위원회가 구시대적인 게임 사전심의 기관에서 사후관리에 중점을 둔 소비자 보호 기관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행성·아케이드 게임을 제외한 일반적인 게임물 심의를 민간에 이양하고, 확률형 아이템 정보 공개 모니터링과 해외 게임업체의 편법 영업 단속 등 업무에 주력하는 방향이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이런 움직임은 2022년 10월 발생한 게이머들의 전례 없는 '검열 반대 집단행동' 사태에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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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서명하려 줄선 게이머들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게임물관리위원회의 비위 의혹에 대한 감사원 감사를 요구하는 게이머들이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실의 연대 서명에 참여하고자 줄을 서고 있다. 2022.10.29 jujuk@yna.co.kr

◇ "18금 상향 근거 불투명" 감사 청구하러 국회 몰려간 게이머들

단초가 된 게임은 넥슨이 지금도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리에 서비스하고 있는 서브컬처(애니메이션풍)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였다.

게임위가 정확한 심의 과정 공개 없이 특정 장면을 문제 삼아 '이용 등급을 상향하거나 내용을 수정하라'고 게임사에 요구한 사실이 공지사항을 통해 알려지면서였다.

그간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권위주의적 게임 심의 제도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20대·30대 청년 게이머들은 거세게 반발하며 집단으로 항의 민원을 제기했다.

김규철 당시 위원장은 기자 간담회를 열고 여론 진화에 나섰으나 오히려 게이머들의 반발만 더 키웠다.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게임위의 등급 분류 시스템 구축사업 과정에 비위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 의원실이 진행한 국민감사 청구 연대 서명에는 단 하루 만에 5천여명의 게이머가 몰렸고, 국회 주변에는 한때 1.5㎞에 달하는 장사진 행렬이 펼쳐졌다.

감사원은 이듬해 6월 감사 결과에서 게임위가 외부 업체가 과업을 완수하지 않았음에도 합격한 것으로 허위 검수한 뒤 대금을 지급해 기관에 최소 6억6천600만원 이상의 피해를 줬다고 결론 내렸다.

또 정보시스템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한지 검증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용역 업체로부터 시스템 납품도 받지 않고 4천200만원의 대금을 지급한 사실도 적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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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게임물관리위원회 사무실 [촬영 김주환]

◇ 감사원 후 급물살 탄 게임물 심의제도 개혁

감사 결과가 나온 후 게임물 심의제도 개혁론은 급물살을 탔다.

2023년 9월에는 게임물 사전심의 의무를 폐지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동의 수 5만명을 넘기며 국회 문체위에 회부됐다.

이 청원은 21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며 폐기됐지만, 정부 주도 게임 심의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 전달되는 계기가 됐다.

문체부는 지난해 1월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자리에서 게임물 등급 분류를 단계적으로 민간에 이양, 완전히 자율화하겠다는 로드맵을 내놨다.

우선 게임문화재단 산하 민간 등급분류기관인 게임콘텐츠등급분류위원회(GCRB)에 모바일 게임 심의 업무를 위탁하고, 2단계로 법 개정을 거쳐 청소년 이용 불가 게임을 위탁한다. 3단계는 중장기적으로 법 개정을 통해 민간에서 완전히 자율 심의를 진행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현재 2단계까지 완료됐지만, 게임 이용자들이 바라는 3단계까지는 아직 국회 논의가 필요한 상태다.

한국게임이용자협회와 유튜버 '김성회의 G식백과' 운영자 김성회 씨는 작년 10월 헌법재판소에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게임 유통을 원천 금지한 현행 게임산업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21만 명의 게임 이용자와 함께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기도 했다.

게임위는 게임물 심의 민간 이양이 완전히 이뤄지고 나면 사후관리 전담 기관으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게임위는 지난해 확률형 아이템 정보 의무 공개 제도가 시행되면서 모니터링 업무를 담당해왔다.

올해 들어서는 '사후관리본부'를 신설하고 게임산업법 추가 개정에 따라 '게임 확률 피해구제센터'를 태스크포스(TF) 형태로 출범하는 등 소비자 보호 업무에 방점을 두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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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는 서태건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서태건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이 6일 서울 중구 CKL 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고 있다. 2024.11.6 jujuk@yna.co.kr

◇ 게임위, 서태건 위원장 취임 후 소통·개방 탄력

작년 8월에는 서태건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게임위 운영과 심의 과정의 불투명성도 대폭 개선됐다.

그간 게임위 위원장은 게임산업 현장과는 거리가 있는 학계 출신 인사들이 주로 임명돼왔으나, 서 위원장은 최근까지 e스포츠 대회 WCG(월드사이버게임즈) 대표와 인디게임 페스티벌 BIC(부산인디커넥트) 조직위원장을 지내는 등 게임·콘텐츠 업계 사정에 밝은 인사로 꼽힌다.

게임위는 서 위원장 취임 직후 여러 내부 자문기구에 외부위원 참여를 대폭 확대했다.

올해 8월에는 위원회 규정을 개정해 별도 '게임자문회의' 관련 조항을 신설, 게임 정책·등급 분류·이용자 보호 등과 관련해 이용자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등급 재분류 자문위원단의 선임 기준에도 게임산업 및 아동 전문가뿐 아니라 게임 이용자까지 포함하도록 해 다수 자문기구에 게임 이용자 참여를 명문화했다.

심의 관행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게임위는 그간 게임 내용과 무관하게 카드 게임이나 슬롯머신 등 콘텐츠가 들어간 게임의 경우 청소년 이용 불가 또는 등급 분류 거부 판정을 내려왔다.

그러나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으로 분류돼 논란이 인 1인용 로그라이크(판마다 구성이 바뀌는 장르) 카드 게임 '발라트로'(Balatro)의 경우 도박성이 전혀 없다는 이용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지난 5월 15세 이용가로 이용 등급을 재조정했다.

게임위 관계자는 "향후에도 이용자들의 의견을 온오프라인 창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등급 분류 기준 세부화 작업도 계속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juju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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