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나쁜 사람도 읽는 글꼴, 세종대왕님 마음과도 통하죠"
노안·저시력자용 글꼴 개발한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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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올폰트를 설명하는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 [촬영 최원정]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처음에는 '글자를 더 두껍게 한 것이 아니냐', '색이 다른 것 아니냐' 못 믿는 반응들이 많아요. 글자만 크게 확대하는 건 단선적인 해결법이고 수용자 중심의 해법도 아니에요. 어떻게 모두가 최대한 같은 가치를 누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죠."
제579돌 한글날을 앞둔 지난 1일 서울 성북구 사무실에서 만난 이종근(58) 디올연구소 대표가 기존 글꼴과 '디올폰트'를 비교한 책자를 보여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대표는 노안이 있는 고령자와 저시력자들을 위해 가독성과 식별성을 높인 글꼴인 디올폰트를 개발했다.
디올폰트는 글자가 뭉쳐 보이는 현상을 막기 위해 두 획이 서로 만나는 부분에 작은 홈을 파는 '잉크트랩' 방식을 적용했다. 한 글자 안에서도 최대한의 여백을 줘 글이 '환하게' 읽히도록 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현재 디올폰트는 빙그레·삼성카드·삼성서울병원을 비롯한 기업과 지자체 등 100여곳에서 쓰고 있다. 특히 좁은 면적에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 작은 글씨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약관과 식품성분표 등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디올폰트는 이 대표와 개발자 5명이 1년 넘게 매달린 끝에 개발했다. 일곱 차례의 사용성 평가와 보완 작업을 거치느라 다른 글꼴에 비해 5배 이상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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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삼성카드 약관(왼쪽)과 디올폰트를 적용한 새 약관 [이종근 디올연구소 대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지금도 한쪽 다리를 저는 이 대표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취업 직후 노트북을 들고 장애인 운전면허 시험장을 찾았다가 충격받은 경험이 디올폰트 개발의 계기가 됐다.
"시험을 보려고 기다리는데 옆 사람이 계속 '직장에 다니냐. 아버지가 사장이냐'고 귀찮게 물어보는 거예요. 근데 그곳에 있던 장애인 130명 중 직장인이 저를 포함해서 두 명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진짜 운이 좋았구나' 하는 부채감과 함께 언젠가는 장애인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다짐했죠."
20여년이 흘러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셔다드리고 돌아오던 길, 눈물 흘리던 이 대표의 마음속에 문득 젊은 날의 다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더 주저할 것 없이 2017년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는 의미를 담아 '디올연구소'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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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바뀐 국립대전현충원 현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대표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글꼴은 당연히 디올폰트지만, 다양한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안중근 의사와 손기정 선수, 방정환 선생, 임권택 감독 등 근현대 역사적 인물들의 손글씨를 디지털 글꼴로 선보이기도 했다.
안 의사가 자필로 쓴 '장부가' 한글 원본 자소를 추출해 개발한 '안중근체'는 2020년 국립대전현충원의 전두환 친필 현판을 교체하면서 새로 건 현판에 사용됐다.
이 대표는 "손 글씨는 인간의 여러 가지 성향을 보여주는 뇌의 지문"이라며 "독립투사의 혼을 담은 글꼴을 통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정신과 연결 지어보려 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 대표의 사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전임 정부가 사회적 경제 지원예산을 대폭 삭감하며 '유탄'을 맞기도 했고, 비용을 이유로 도입을 꺼리는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에 실망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이 대표는 한글을 바라볼 때마다 세종의 애민 정신을 떠올린다고 한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뜻을 마음껏 펴지 못하는 것을 어여삐(불쌍히) 여긴 측은지심'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라고 그는 강조한다.
"글자는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만드신 거 아니겠어요? 정보 전달에서 보편적이고 촘촘한 평등은 필수적이라는 거죠. 불편을 당연시하지 않고 새로운 성장과 발전, 진화의 초석으로 삼는 생각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바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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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전화'로 담아보는 세종대왕님 [연합뉴스 자료사진]
away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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