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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城)인 연천 호로고루 [사진/임헌정 기자]
(연천=조중동e뉴스) 임헌정 기자 = 경기도 최북단,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안보 관광지로만 알려졌던 연천군이 수도권 전철 개통과 함께 역사, 문화,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체험 여행의 보고(寶庫)로 거듭나고 있다. 2023년 12월, 동두천과 연천을 잇는 경원선 전철이 운행을 시작하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한층 가까워진 연천.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 속에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국전쟁의 상흔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연천의 다채로운 풍경 속으로 떠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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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역 관광안내소 [사진/임헌정 기자]
◇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관문, 연천역
여행의 시작점인 연천역에 내리는 순간부터 시간여행은 시작된다. 시간당 1회꼴로 운행하는 전철을 타고 서울 도심과는 다른 한적한 풍경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연천역 플랫폼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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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역 급수탑과 증기기관차 [사진/임헌정 기자]
관광안내소 뒤편으로는 회색빛 콘크리트 구조물 두 개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원통형과 상자형의 이 구조물들은 과거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급수탑 외벽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벌집처럼 남아 분단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옆에 전시된 증기기관차 모형과 어우러져, 이곳이 한때 철마가 원산을 향해 달리던 교통의 요지였음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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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투어 버스 탑승 [사진/임헌정 기자]
‘가성비 최고’ 시간여행, 연천 시티투어 버스
연천의 주요 명소들은 대중교통만으로 둘러보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럴 때 가장 유용한 것이 바로 ‘연천 시티투어’다. 저렴한 비용으로 핵심 관광지를 문화관광해설사의 깊이 있는 설명과 함께 돌아볼 수 있어 여행의 만족도를 극대화한다.
[시티투어 버스 탑승] 연천역 관광안내소 앞에서 출발하는 강렬한 붉은색의 시티투어 버스에 오르면 본격적인 역사문화체험이 시작된다. 취재팀이 탑승한 목요일 코스는 고려의 숨결을 간직한 숭의전에서 출발해 백학역사박물관, 고랑포구, 호로고루를 거쳐 다시 연천역으로 돌아오는 4시간가량의 알찬 여정이다. 신은경 문화관광해설사는 “연천은 인구 4만 1천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율무와 콩, 인삼 등 특산물이 유명하고 일교차가 커 과일 맛도 일품”이라며 연천에 대한 애정 어린 소개로 투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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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전 [사진/임헌정 기자]
고려 왕조의 명맥을 잇는 사당, 숭의전
[숭의전] 버스로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숭의전은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이었던 앙암사 터에 자리 잡은 사당이다. 조선 왕조는 전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이곳에 고려 태조와 현종, 문종, 원종 등 4명의 왕을 모셨다. 비록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되었지만, 매년 봄과 가을에 봉행되는 제례를 통해 고려 왕조의 명맥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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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 [사진/임헌정 기자]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 숭의전 본전 옆으로는 ‘배신청’이라는 건물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을 비롯해 강감찬, 김방경 등 고려 시대 공신 1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을 기리는 공간의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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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 느티나무 [사진/임헌정 기자]
[보호수 느티나무] 숭의전 경내에는 역사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본 증인이 있다. 수령 600년이 훌쩍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 주인공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보호수는 숭의전의 역사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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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역사박물관 내부 [사진/임헌정 기자]
◇ 마을의 기억을 담은 박물관과 전쟁 영웅의 이야기
[백학역사박물관 내부] 다음 목적지인 백학역사박물관은 주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조성한 특별한 공간이다. 백학마을의 100년 근현대사를 담기 위해 옛 철모와 수통, 3·1 운동 기록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사진 등 소중한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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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클리스 동상 [사진/임헌정 기자]
[ 레클리스 동상] 박물관을 나와 인근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가면 특별한 동상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한국전쟁의 숨은 영웅, 군마(軍馬) ‘레클리스’다. 본래 ‘아침해’라는 이름의 경주마였던 레클리스는 미 해병대에 팔려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연천 네바다 전투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을 50여 차례나 오가며 탄약을 운반하고 부상병을 실어 날랐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미군 하사 계급까지 부여받았다. 그의 동상은 말이 아닌 ‘전우’로서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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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고랑포구 [사진/임헌정 기자]
◇ 영화와 쇠락의 역사가 흐르는 임진강 고랑포구
[ 임진강 고랑포구] 지금은 어업 허가를 받은 작은 배 한 척만이 평화롭게 떠 있는 고요한 나루터지만, 고랑포구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 북부 최고의 무역항이었다. 서울 화신백화점 분점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으나,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지금은 무성한 수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설사가 보여주는 옛 흑백 사진 속 번화했던 모습과 현재의 풍경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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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포구의 주상절리 [사진/임헌정 기자]
[고랑포구의 주상절리] 고요한 강 풍경 속에서도 자연의 위대함은 빛을 발한다. 강가 절벽에는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진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독특한 지질학적 경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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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산책길에 핀 황화 코스모스 [사진/임헌정 기자]
◇ 고구려의 기상과 SNS 명소의 만남, 호로고루
[사진 설명: 호로고루 산책길에 핀 황화 코스모스] 시티투어의 마지막 코스인 호로고루는 연천 여행의 화룡점정이다. 임진강이 표주박(호로)처럼 굽이치는 곳에 자리한 이 고구려성은 과거 삼국의 격전지였던 군사적 요충지다. 호로고루홍보관을 지나 성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계절마다 황화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만발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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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의 '천국의 계단' [사진/임헌정 기자]
[호로고루의 '천국의 계단'] 성벽 뒤편으로 돌아가면 호로고루의 상징과도 같은 ‘천국의 계단’이 나타난다. 성벽 꼭대기를 향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이 계단은 파란 하늘과 맞닿아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며, SNS 최고의 사진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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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 [사진/임헌정 기자]
[ 호로고루] 호로고루는 현무암과 편마암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이 인상적이다. 성벽 앞으로는 하늘을 향해 솟은 솟대와 크고 작은 의자들이 놓여 있어 마치 현대미술 작품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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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에서 보이는 임진강 [사진/임헌정 기자]
[사진 설명: 호로고루에서 보이는 임진강] 계단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발아래로 삼각형 모양의 성곽 대지와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그리고 강 건너 비무장지대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구려 병사들이 지켰을 이 자리에서 바라보는 평화로운 풍경은 깊은 감동과 함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를 꽉 채운 연천으로의 여행. 전철을 이용한 편리한 접근성과 알찬 시티투어 코스는 접경지 연천이 품고 있던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 자연의 매력을 발견하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 특별한 시간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연천은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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