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감정의 정치는 집단적 광기의 공장일 뿐

정치가 한 번 비틀거리면 진영은 기다렸다는 듯 ‘너희는 백 번을 사과하라’는 주문을 반복하고, 실수가 상대 진영에서 나오면 이번엔 그 반대가 똑같은 주문을 되풀이한다. 칸트가 말한 이성의 자기 규율은 사라지고, 집단적 복수심만이 무대 중앙을 점령한다.

이렇게 감정이 권력을 대신해 판단을 내리는 순간 정치의 품격은 즉시 붕괴하고 국가는 진흙탕 개싸움으로 전락한다. 국민은 그 개싸움을 구경하는 관객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질식하는 희생자가 된다. 국가는 감정이 아니라 절차와 규범으로 버티는데, 지금의 정치판은 원칙보다 분노를 사고파는 시장처럼 퇴행하고 있다. 바로 그때 국가는 위험해진다.

Ⅱ. 권력이 사법을 장악하려는 순간, 국가 목엔 올가미

권력이 사법에 손을 대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불의를 척결해야 한다.’ 이러한 핑계로 사법의 독립은 서서히 침식된다. 아렌트가 말했듯 전체주의는 언제나 정의의 언어를 도용해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지금 한국 정치 역시 그 위험한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과 여당은 인사 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설명 대신 은폐와 시간 끌기로 대응하고, 사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을 여론전의 무기로 전락시키고 있다.

반대로 민주당은 자신들의 허물에는 침묵하거나 축소하고, 상대 진영의 문제에는 분노를 증폭시켜 정의의 얼굴을 가장한다. 이쯤 되면 어느 쪽도 사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롤스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의 기본 구조를 지탱하는 공정성의 원칙이 여야에 의해 동시에 침식당하고 있다. 이렇게 사법의 영역에 정치가 손을 대는 순간, 국가는 구조적 파괴로 진입한다.

Ⅲ. 베네수엘라, ‘정의를 앞세운 사법 장악’이 국가를 어떻게 잔혹하게 파괴했는가?

베네수엘라는 처음에 정의를 외쳤다. 부패를 단죄하겠다며 사법 인사를 장악했고, 판사 선임 과정에 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중의 분노를 도구로 삼자 사법 통제는 개혁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그 순간부터 반대파는 자연스럽게 법을 어긴 자가 되었고, 권력이 임명한 검사와 판사는 정권의 적을 사법적 절차라는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제거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체주의의 기술이라 했다. 사법이 꺾이면 시민의 자유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국가는 스스로를 파괴한다.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멀리 있는 외국의 비극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 사법을 권력이 장악하려 할 때 반드시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이다.

Ⅳ. 계엄 논란은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자화상

계엄 1년을 둘러싼 정쟁은 책임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경쟁에 가깝다. 민주당은 상대를 향해 내란 프레임을 던지며 정치를 사법의 영역까지 끌어당기고, 대통령과 여권은 계엄의 발생 배경을 정면으로 설명하지 않은 채 논점을 흐리며 시간을 번다.

칸트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원칙을 잃은 정치는 도덕적 파국을 은폐하기 위해 언어를 남용한다.’ 계엄은 헌정질서가 극도의 긴장을 경험했다는 뜻인데, 이를 진영의 무기로 사용하는 순간 국가는 제도적 자해를 시작한다. 롤스가 강조한 기본 구조의 안정성은 바로 이런 순간에 파괴된다.

Ⅴ. 권력의 폭거는 여당, 대통령, 대통령실에서도 동시에 자란다.

지금 한국 정치는 병세가 한 군데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여당인 민주당의 의회 폭거,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 가리기, 그리고 대통령실의 사적 인사 개입 논란 이 세 가지가 서로 맞물리며 국가 운영 전체를 뒤틀어 놓고 있다.

민주당은 거대 의석을 책임이 아니라 면허처럼 오남용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절차를 생략하거나 토론을 압축하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 있어 속도전이 우선되는 모습은 의회주의의 핵심인 숙의와 견제의 원리를 경시하는 행위다.

다수의 힘이 법이 되는 순간, 법은 진영의 주술로 변한다. 이는 아렌트가 경고한 “법 없는 권력의 폭력성”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대통령도 큰 문제다. 대통령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자, 이를 축소하거나 가려는 듯한 모습이 반복되며 국가 운영의 신뢰는 추락하고 있다.

지도자가 법적 문제를 투명하게 다루지 않을 때, 국정 전반은 방어 모드로 전환되고, 행정부는 국가 운영보다 리스크 관리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대통령실조차 자유롭지 않다. 사적 인사 청탁으로 비칠 만한 잡음들이 이어지고, 공적 권한이 사적 네트워크와 접속되는 듯한 장면들이 반복되면서 대통령실의 인사 시스템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친분이 기준이 되는 순간 공직은 사유화되고, 나라는 친정(親政)이 아니라 친분 정권의 위험에 빠진다. 인사는 국정의 심장인데, 심장이 사적 이해에 뚫리면 국가 전체가 부패의 혈관에 잠식된다.

결국 문제는 진영이 아니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가 제도를 어떻게 다루느냐다. 그리고 지금 한국 정치의 세 권력 여당, 대통령, 대통령실 모두가 제도를 보호하기보다 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감정으로 국가는 운영되지 않는다. 권력의 편의로 법을 구부리는 순간, 정치의 중심은 이미 썩기 시작한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한 진영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세 권력이 동시에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위험하다. 그리고 그 위험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고무열 박사(안전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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