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오르면 모두가 고통받는다는 건 착각"
블라이스·프라카롤리가 쓴 신간 '인플레이션의 습격'

X
각 나라의 화폐 [EPA=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인플레이션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실업과 다르다…인플레이션은 사회 전반에 충격을 준다."

'양적완화'라는 돈 풀기 방식으로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한 유명한 말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 브라운대 교수인 마크 블라이스와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인 니콜로 프라카롤리는 신간 '인플레이션의 습격'(21세기북스)에서 버냉키의 말을 반박한다. "인플레이션은 모두에게 같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서다.

이들에 따르면 물가가 오르면 모두가 똑같이 고통받는다는 담론은 착각이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지만, 누군가는 엄청난 이득을 본다. 역사적으로 그랬다. '볼커의 망치'라 불렸던 1970년대 말 시작된 금리 인상이 대표적 예다.

X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 [EPA=연합뉴스]

1979년 8월 연준 의장에 취임한 폴 볼커는 즉시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베트남 전쟁 비용, 사회복지 정부 지출 증가, 실업률 저하 등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취임 전 금리는 10%였으나 약 2년 만인 1981년 6월 19%로 9%포인트 올랐다.

금리를 급격히 올리자 물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1980년 14.6%에 이르던 물가 상승률은 시중 유동성이 줄면서 1981년 중반 9%대로 꺾였고, 이듬해에는 4%대로, 1983년에는 2.3%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볼커의 망치'는 부작용도 낳았다. 금리 인상은 고용감소를 초래했다. 1979년 5.6%였던 실업률은 1982년 말 10.8%로 치솟았다. 수많은 기업이 파산했고, 경기는 크게 둔화했다.

X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EPA=연합뉴스]

연준의 긴축 통화정책은 분배정책에도 중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자산을 지닌 채권자에게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으니 유리했으나 채무자들은 불리했다. 특히 경기 둔화 시 실직할 가능성이 큰 저소득층 채무자들의 손해는 컸다.

금리 인상은 또한 국가 채무의 이자 비용까지 끌어올려 복지 지출, 실업 수당과 같은 정부 지출이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저소득층의 피해는 한층 더 가중됐다.

해외 신흥국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신흥국은 대량의 달러 대출을 받은 상태였는데, 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가 상승하자 채무 불이행 위기에 놓였다. 결국 연준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추가 대출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경기 둔화도 발생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일곱개 선진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금리 인상은 일반적 인식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경기를 둔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1%포인트 인상할 경우, 금리를 그대로 유지할 때보다 경제 생산량이 5% 감소하며 그 영향은 12년 동안 지속됐다.

X
미국 연준 [로이터=연합뉴스]

금리 인상은 이처럼 사회적 고통을 낳으나 수혜를 보는 집단도 있다. 채권자들과 비교적 튼실한 기업들이 그렇다. IMF는 보고서를 통해 2022~2023년 기업 이익 증가가 유럽 인플레이션의 절반 가까이인 45%를 유발했다고 분석하면서 기업들이 "명목적인 비용 충격 이상을 가격에 전가했다"고 지적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을 이유로 기업들이 제품 가격을 크게 올렸다는 얘기다. 반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인플레이션을 상쇄할 정도로 오르지 않았다. 이는 지난 30년간 각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노동 유연화를 추진한 정책, 즉 세계화의 결과였다. 결국 물가 상승의 혜택이 기업들에만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기업 이익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1% 증가한 반면 노동비용은 팬데믹 이전보다 2% 감소했다. 저자들은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하면 기업이 큰 승리를 거둔 셈"이라고 지적한다.

X
[21세기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문제는 이 같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일단 기후 위기로 주기적 공급 충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홍수, 가뭄, 산불이 농업과 에너지 생산을 교란하고, 탈탄소 전환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해서다. 지정학적 갈등도 글로벌 공급망에 악영향을 미친다. 미·중 무역전쟁, 관세 폭탄 등이 세계화의 혜택을 되돌릴 가능성이 있다. 이와 함께 인구 구조 변화가 노동력 부족과 임금 상승 압력을 만든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저자들은 이런 복합적 요인은 더 이상 '일시적 물가 상승'이 아니라, '경제의 구조적 전환 신호'임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서정아 옮김. 352쪽.

buff27@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