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의 증언과 평화에 대한 염원
정찬주의 『광주 아리랑』(다연, 2020)은 5월 14일 전남대 서명원 학생과장이 학생들의 데모를 보고받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5월 27일 서석동에 사는 대동고 이희규 교사가 도청 상황이 궁금하여 대문을 나서다가 계엄군의 총구를 발견하고 황망히 방으로 들어가서 노트에 글을 남기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14일간의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서술한 소설이다.
지금까지 공적인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고 소설가들이 다루지 못한 역사적 진실을 대학 교직원, 상인, 연극인, 야학 선생, 야학생, 주방장, 운동권 학생, 비운동권 학생, 경찰, 군인, 운전수, 페인트공, 용접공, 가구공, 선반공, 공장 여공, 예비군, 영업사원, 재수생, 구두닦이, 농사꾼, 교사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송기숙, 명노근, 박효선, 박정권, 이희규, 임철우, 허순이, 윤상원, 박관현, 김상윤, 서명원 등은 실명이 거명되고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80년 5월에 함께하지 못한 부채의식’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필자도 사망한 재종숙, 친구,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는 친구와 후배 그리고 친척들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정찬주 작가
80년 5월 18일 새벽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서울대 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전날 계엄군이 학교에 투입된 사실은 나중에 대학원 후배를 통해서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원로교수가 실험실에서 당장 할 일이 있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공수부대 장교가 장갑차에서 내려와서 원로교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원로교수가 일그러진 표정을 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자양동으로 가는 길에 광주항쟁에 대한 뉴스를 들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이 걱정되어 광주에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모친은 광주에서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면서 동생들을 데려오겠다고 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광주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80년 1월 대동고 이희규, 서석고 박정권, 구례중 박효선이 옥과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해가 질 무렵 박효선은 당직을 서야 한다면서 구례로 갔고, 우리는 석곡 읍내 이희규 집으로 갔다. 신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박정권이 박효선을 광주 경신여고로 이끌었다. 박효선은 구시청사거리 인근에 있는 소극장에서 황석영과 「한씨연대기」를 각색하여 연극을 준비하다가 광주항쟁에 뛰어들었다. 대치 상황이 극에 달할 즈음 입주 과외 학생의 모친은 ‘광주사태로 사업이 엉망이 되었다면서 광주를 공습해서 싹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평양 출신 지주의 딸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어린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비행기 공습이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입을 다물었다.
차편이 끊긴 주월동까지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두 아들과 상봉한 모친의 설득에도 대동고 3학년 준호는 광주에 남았고 동신고 1학년 휘호는 모친과 고향으로 돌아갔다. 박효선은 광주를 탈출하여 늦은 밤에 나에게 전화했다. 학생의 부친에게 ‘크베’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꼬치꼬치 물어서 전화를 끊었고, 다음 날 정찬주에게 전화하여 은신처를 찾았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희규나 박정권이라고 하지 않고 본인이 극도로 듣기 싫어했던 ‘크베’라고 했을까? 학생의 부친이 형사라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박효선의 형사 같더라는 말을 학생에게 확인하여 알았다. 취업보도실에 입주 과외 신청자 전형규의 보호자가 사장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 부부가 같이 일을 하는 줄 알았다. 효선이 망월동 묘역에 묻히던 날, ‘5월 광대 故 박효선 민족예술인장’을 지켜보고 글을 집필하였다. 나중에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바이러스에 걸려 파일이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5월 광주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광주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가해자를 추종하는 자들이 아직도 주장하고 있는 색깔론이나 증오에 맞서 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고 평화를 지키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증언자들은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과 학생들의 죽음을 보고 항쟁에 가담했지만, 양심의 부름에 호응했을 뿐 평화를 추구한 사람들이다. 왜 울분을 토했고 계엄군과 맞서 싸웠는지 그들이 체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작가는 5.18민주화운동을 체험한 다양한 인물의 시각으로 증언을 시도하여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에게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되묻고 있다. 사회 양극화와 인간 생명에 대한 경시는 인간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겸손한 성찰이 부족한 데서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증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희규는 사방에서 공포와 울분, 부끄러움과 슬픔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고 했고, 박정권은 박효선을 광주로 이끌지 않았더라면 구례에서 무탈하지 지내지 않았을까 자책했다. 이희규가 희곡을 쓰고 박정권이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면 이희규가 쓸 희곡과 박정권이 올릴 연극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증언이 될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가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6.25 전쟁소설과 회고담을 창작하고 있는 것처럼 5월 광주의 증언 문학은 목격자들과 그들의 후대가 증언하는 한 끊임없이 창작되어야 한다.
송현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주대 인문대학장, 절강대 교환교수, 서울대 객원연구원, 연변대 교환교수, 중앙민족대 석학교수, 길림대(주해) 체류교수, 남부대 석좌교수, 문학평론가협회 국제이사, 학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현대문학회 부회장, 한중인문학회 회장,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한국학진흥사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세계인명사전 Marquis Who’s Who에 등재되었다.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 한국현대소설학회 명예회장, 한중인문학회 명예회장, 안휘재경대 석좌교수, 절강월수외대 석좌교수, 무한대 한국학진흥사업단 수석연구원, 포토맥포럼 한국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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